요나서 강해 4장

요나 4장

요나서 4장은 하나님과 요나의 변론이 이어집니다. 요나의 일방적 항의에 가까우며, 하나님은 요나의 항의에 대해 박넝쿨을 통하여 교훈하십니다. 니느웨의 멸망을 바라는 요나와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요나서의 핵심인 긍휼과 사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요나서 4장 구조

  • 1-4절 하나님과 요나의 논쟁
  • 5-11절 하나님의 실물교훈

요나 4장 강해

4장은 하나님과 요나의 두 번의 논쟁이 담겨 있습니다. 1-4절에서는 말로 논쟁하시고, 5-11절까지는 실물교훈을 통해 요나를 가르치십니다. 요나의 핵심이자 주제는 11절에 담겨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1-4절 논쟁1, 나는 알았다.

요나가 성내어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용서하자 요나가 화를 냅니다.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도 자신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교만한 마음이 들어가 있습니다. 선지자로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보편적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진 선지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악에 휘둘릴 수 있는 보여줍니다.

요나의 성냄과 싫음이 매우 악한 것은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것 때문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대로, 욕심대로 해결 되지 않자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습니다. 요나의 명예가 담겨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니느웨성이 무너진다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십일 지나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거짓말 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억울합니다. 그 억울함을 말로 분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는 성이 난 채로 기도합니다. 성도에게 있어 가장 좋지 않은 기도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모든 기도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가식이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 성이 나지만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성이 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당신이 성남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2장의 기도와 4장의 기도는 너무나 다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요나는 터지듯 기도가 쏟아졌지만 4장에는 분노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이렇게 다른 가봅니다.

주께서는

요나는 자신의 다시스로 도망간 이유를 밝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롭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요다는 처음부터 니느웨가 만약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너무 싫었던 것이죠. 결국 요나는 아직도 니느웨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 못했고,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글픔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2절은 기도라기 보다는 조롱에 가깝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바로 그 성품 때문에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가려 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입니까? “은혜로우시며(한눈1) 자비로우시며(라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헤세드)가 크시사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성을 내자 하나님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따져 물으십니다. 성냄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부정하는 매우 교만한 것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요나는 성냄이 부당합니다. 먼저는 그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자입니다. 그 말씀이 응하고 응하지 안하고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지자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요나는 자신의 본문을 잃고 자신이 마치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을 자신의 마음대로 해석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계명은 판단할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합니다.

5-11절 논쟁 2. 실물교훈

요나가 초막을 짓고

요나는 하나님의 질문에 답도 하지 않고 성의 동쪽 언덕에 초막2을 짓고 성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려 합니다. 요나는 분명히 이렇게까지 성을 냈으니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들어 줄거야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자서전적 입장에서 본다면 이 부분은 요나의 수치가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가감 없이 드러낸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들추어 냄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밝히 드러내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성경에서 동쪽은 부정한 곳이며 심판과 저주가 있는 곳입니다. 이방인들은 동방 사람, 동방 풍습 등으로 표현합니다.

박넝쿨을 준비하사

이때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의 초막을 덮어 그늘을 만듭니다.3 요나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벌레를 예비하사 박넝쿨을 갉아먹게 합니다. 그곳에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여 불게 하니 요나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릅니다. 우리는 박넝쿨로 번역된 식물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애써 비슷한 식물을 찾으려 하지만 요나서에 등장하는 식물처럼 빨리 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자 박넝쿨과 벌레를 통해 기쁨과 고통을 함께 선사합니다. 박넝쿨은 잠시의 기쁨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얻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전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기쁨도 주지만 고통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요나는 박넝쿨로 인해 하나님께 또 성을 냅니다. 하나님은 벌레가 갉아먹게 하고 뜨거운 동풍까지 불게 하여 요나의 박넝쿨을 갑자기 마르게 하셨습니다. 이에 요나는 너무나 화가 난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 기뻐하고, 작은 것에 슬퍼합니다. 일희일비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물며

드디어 요나서의 핵심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아낀 박넝쿨과 니느웨 사람들을 비교합니다. 하지만 본문에 빠진 비교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내가 니느웨 사람들을 아꼈다면 내 사랑하는 이스라엘은 얼마나 더 아끼겠느냐?”

‘하물며’는 단순히 니느웨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도 아낀다면 나의 아들 이스라엘은 얼마나 더 사랑하겠느냐입니다. 신약에서 주님이 사용하신 ‘하물며’를 봅시다.

  • 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누가복음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요나서의 핵심은 ‘하물며’라는 단어에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부유하면 할수록 범죄 하고, 복을 주면 줄수록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에게 돌아오라 그러면 너희를 용서하고 복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1. ‘한눈’은 형용사 남성단수이며,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특별히 회개한 사람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
  2. 초막(수카)는 가축이 우리나 은신처가 되는 수풀, 포도원의 원두막 등을 말합니다. 숨기려는 목적이 강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초막은 곧바로 광야의 삶을 기억나게 합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초막을 통하 그들의 외부의 햇빛이나 추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초막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가 초막을 짓고 초막이 갖는 ‘감사’의 의미와 전혀 다른 원망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3. 하나님(엘로힘)은 확실히 창세기 1장의 창조주를 떠올립니다. 당넝쿨을 만드신 것도 창조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1장에서 바다의 하나님은 4장에 땅의 식물들의 하나님으로 소개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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