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 3장

요나서 3장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두 번째 하나님의 소명을 받습니다. 내용은 동일하게 니느웨의 악을 고발하고 심판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고 곧바로 니느웨로 가서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 선포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뇌우치고, 왕은 조서를 내려 금식하게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합니다. 하나님은 니느웨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내릴 심판을 내리지 않습니다.

요나 3장 구조

  • 1-3장 두 번째 임한 말씀
  • 4-9절 요나의 선포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 10절 돌이키시는 하나님
물고기 뱃속에 나오는 요나

요나 3장 강해

1-3절 다시 받는 소명

요나는 삼일 밤낮 삼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1:17) 죽어야 함에도 죽지 않은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고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완악한 세대를 향하여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며 그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임한 말씀

두 번째, 즉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합니다. ‘두 번째’는 은혜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며 도망쳤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고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죽음에서 그를 구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의 실수로 모든 사람을 치지 않으십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요나에게 임하니라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지한 자,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요나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입을 다물면 니느웨 사람들은 듣지 못합니다. 이처럼 선지자는 중요합니다. 요나는 신약의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합니다. 교회가 요나처럼 침묵한다면 복음은 전파되지 않습니다. 요나의 입술에 니느웨 사람들의 목숨이 달리 것처럼 교회의 사명은 입을 열어 주의 복음을 전하여 죽은 자들을 살려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교회의 다양한 행사가 있고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본질적 사역은 전도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 그것이 교회가 우선순위에 두고 행야할 일입니다.

선포하라

선지자는 창조자가 아니라 전달자입니다. 그는 왕이 아니라 대사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붙이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선포하라(바바르 דָבַר)’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타협하라’ ‘설명하라’가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타협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큰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4-9절 요나의 선포와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들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는 여호와께 받은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은 저주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요나가 전한 메시지는 조건 없는 선포입니다. 단지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진다는 선포만 있습니다. 회개하면 용서한다는 조건이 없습니다. 얼마나 부담되는 말씀입니까? 요나는 말씀을 전하다 죽을 수 도 있습니다. 앗수르인들은 굉장히 포악한 자들입니다. 후에 그들이 이스라엘과 타국을 정복하는 과정을 보면 잔인해서 말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는 물러서지 않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설교자요 선포자입니다.

  • 성경 속의 사십일

성경에서 사십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종종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나는 것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금식했고,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고, 엘리야는 40일을 광야로 도망칩니다. 노아의 홍수가 40일에 일어난 것을 보면 40일은 심판과 광야와 같은 고난과 심판과 연관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에게 주어진 40일은 하나님의 심판 직전의 유보 기간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한 것처럼 큰 시험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 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5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뜻밖에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히브리어 순서대로 앞부분을 직역하면

  • 그리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

‘믿었다’는 히브리어 ‘아만(אָמַן)’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 사용했고(창 15:6), 모세 하나님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출 4:1)에서도 ‘믿는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만(אָמַן)’은 ‘신뢰히다’ ‘의지하다’ 등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어떤 것을 믿은 걸까요? 성경은 여기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문맥상 요나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저주의 선포를 믿은 것입니다.

보좌에서 일어나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요나의 전파가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문에 소문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니느웨 왕에게까지 들려옵니다. 그러자 왕은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재 위에 앉습니다. 옷은 정체성이자 신분, 권위를 드러냅니다. 왕으로서의 신분을 모두 내려놓고 죄인처럼 행동합니다. 놀라운 표현입니다. 요나서를 읽을 때는 요나의 자서전적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더니 원수인 앗수르 백성들은 당장 회개합니다. 참으로 기이할 뿐입니다.

조서를 내려

왕은 혼자만의 문제로 보지 않고 전 국민들이 함께 동참하게 합니다. 그는 조서를 내려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강포에서 떠날 것을 명령합니다. 놀라운 왕의 리더십입니다. 탐욕에 찌들어 살 수 있음에도 그는 백성이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찾아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을 사용해 위기에서 헤쳐 나올 방법을 강구합니다.

10절 돌이키시는 하나님

9절과 10절 모두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사건을 마무리합니다. 9절은 왕의 마음이고, 10절은 왕의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화답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비록 거룩하시고 엄위로우신 분이지만 회개하며 엎드린 자들에게는 한 없이 약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죄를 용서하십니다.

보시고

하나님의 용서는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을 보시는 전지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보시고 니느웨 사람들의 진심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동에 속지 않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하나님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십니다.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어둠이 없으며, 오직 빛만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히브리서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3장은 다시 소명자로 나서는 요나와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니느웨 사람들과 왕이 소개됩니다. 4장에서 곧 드러나지만 요나는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 분인지. 그 악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자 용서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더 사랑하시고, 용서하고 싶어 할까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완악하여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나의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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