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장 묵상

마태복음 8장 개요

8장은 산 위에서 말씀 하시던 주님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산에서 내려오시자 곧바로 나병 환자가 찾아와 고쳐 달라 간구하고, 백부장이 찾아와 자신의 하인을 고쳐 달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만 계시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들어가십니다. 사람 사이를 지나시면서 병든 자를 치유하시며 회복하십니다. 8장은 많은 치유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구조

1-4절 나병환자를 치유하심
5-13절 백부장의 믿음
14-17절 이사야의 예언
18-22절 제자도를 가르치심
23-27절 폭풍을 잠잠케 하심
28-34절 가다라 지방에서 축사하심

마태복음 8장 묵상

1-4절 나병환자를 치유하심

산에서 내려 오시니

마태복음에서 산은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5장에서 예수님은 산에 오르시고(참 마 5:1) 이제는 내려 오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출애굽 당시 시내산에 올라 모세가 받았던 율법과 같은 권위가 부여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권위 있는 자와 같고'(7:29)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제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내가 원하노니

나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병든 자를 만지면 부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3절) 치유하십니다. 부정한 자를 만지지만 부정하게되지 않고 부정한 자를 온전케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이며, 구약과 신약의 현저한 차이입니다.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이 병에 걸린 자를 판별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관습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선언으로 그는 성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회복합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버려진 그가 다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5-13절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의 간구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당시 로마의 백부장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직접 와서 자신의 하인을 고쳐 달라 말합니다. 얼마든지 사람들을 들일 수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치유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가 깎이는 것을 감내하고 자신의 하인을 치료하고 싶어합니다. 아마도 참으로 아끼는 하인으로 보입니다. 주인이 하인을 아끼는 것은 일상적이나 자신의 명예까지 포기하면서 간구하는 것은 독특한 사건입니다.

백부장의 믿음만 강조되지만 그 믿음 이전에 그의 성품과 사람 됨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성품 위에서 생깁니다. 악한 성품은 믿음이 있어도 악한 삶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으로만

예수님께서 직접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 하자 백부장은 손사례를 치며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8절)라고 말합니다. 당시 병을 치유하는 것은 직접 가서 뭔가를 해야 합니다. 굿도하고 하여튼 뭔가를 해야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놀랍게도 다만 말씀으로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가라 하면 가고

군인의 생각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함으로 자신의 직무을 합니다. 백부장은 사회적으로 예수님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음에도 예수님의 종이나 부하와 같다고 스스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명령함으로 순종하듯, 하인의 중풍병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들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원이 되는 인물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말할 때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혈통을 따라 난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12절)게 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14-17절 이사야의 예언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다.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주님은 베드로의 집에 갑니다. 베드로는 처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자 예수님께서 고쳐 주십니다. 장모 뿐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 에수님은 치유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되길 원합니다.

18-22절 제자도를 가르치심

인자는

한 서기관이 와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십니다. 이번에는 아버지를 먼저 장사하게 해달라고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하시며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이것은 우선 순위에 대한 것입니다.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자신이 해보고 싶은 거 다하고 그 다음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남은 시간, 여분의 시간, 짜투리 시간을 드려서는 안 되됩니다. 당신의 중심,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드려야 합니다.

23-27절 폭풍을 잠잠케 하심

예수님께서 파도를 잠잠케 하십니다.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보여주십니다. 마태복음은 매우 짧게 이 부분을 설명합니다.

바다에

갈릴리는 호수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바다’로 불렀습니다. 단순히 그들이 사는 땅이 작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다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로마인의 입장에서 ‘호수’로 표기합니다.

예수께서 주무시다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무십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주무실 수 있을까요? 사역으로 인해 너무나 힘든 시간을 매일 보내야 하는 예수님은 틈만 나면 주무셔야 했습니다. 배에 오르자 폭풍이 일어났지만 예수님은 곧바로 잠에 빠져듭니다. 신이졌지만 철저히 한 사람으로 살아가셨던 주님이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자 참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여기에 큰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제자들은 늘 예수님과 함께 하며 놀라운 기적들을 보았지만 또 다시 시련이 오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잊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 한 배는 안전합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는 어려운 환경, 모호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게 합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큰 믿음은 주님에 대한 확신이 깊은 사람이고, 작은 믿음은 믿음과 불신 사이를 오가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주님께 전적으로 자신들을 의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난 놀은 그냥 놀이 아니라 뒤에는 악한 영들이 제자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상황을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너머에 악한 영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아마도 주님의 뜻을 거역하고 악한 영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꾸짖은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의 꾸짖음에 바람이 멈추고 바다가 잠잠해 집니다.

28-34절 가다라 지방에서 축사하심

무덤 사이에서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자 귀신들린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 거합니다. 또한 몹시 사납습니다. 무덤은 죽은 시체가 있는 것으로 부정한 곳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납다는 말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으로 찾아가십니다.

돼지 떼

돼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가다라 지방은 갈릴리 남동부 지방에 해당되며 로마인들이 거하는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돼지를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사육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놀랍게 유대인들이 찾아 예수님을 마을에서 나가달라 부탁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기르지 않지만 이방 사람들을 고용하여 돼지를 키우고 그것을 이방인들, 특히 로마 군사들에게 팔아 이윤을 챙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 말하고, 우습게 여깁니다. 하지만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 봅니다. 귀신들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하지만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지식입니다.

예수님을 내 보내다

돼치 치던 자들이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깜짝 놀라 마을로 내려갑니다. 그들의 보고 들은 것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해 줍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과연 돼지들이 몰사해 죽어 있는 것을 봅니다. 동네 사람들은 한 소리로 예수님께 이 동네에서 떠나 달라 부탁합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수많은 돼지들이 몰사했습니다. 그들에게 한 사람의 치료를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돼지들이 죽어 손해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밖으로 추방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부와 권력 명예만을 추구하고 있지 않는지요. 만약 그것들을 얻는데 예수님이 방해가 되면 예수님을 자신에게서 추방하지 않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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