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선하다 부르는 시대에 임하는 거룩한 심판
- 22일(수) 이사야 5:18-30 묵상
죄악을 수레줄로 끄는 사람들 (사 5:18-19)
이사야 5장 전반부는 사랑의 포도원 노래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기름진 산에 심으시고 돌을 제하며 극상품 포도나무처럼 가꾸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좋은 포도가 아니라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신 것은 정의와 공의였지만, 실제로는 포학과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화 있을진저”라는 탄식의 언어로 백성의 죄를 하나씩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하는 탐욕, 새벽부터 술을 찾는 쾌락과 영적 무감각,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지 못하는 무지가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제 18절부터는 더 깊은 영적 병이 드러납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에게 화가 있습니다. 죄가 우연히 발에 묻은 먼지처럼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죄악을 끌고 갑니다. 그것도 가느다란 끈이 아니라 수레줄처럼 굵은 줄로 끌고 갑니다. 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짐처럼 붙들고, 습관처럼 운반하며, 의지적으로 끌고 가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죄악”은 아본(עָוֹן)의 세계와 연결됩니다. 아본은 단순한 실수라기보다 비뚤어짐, 왜곡, 죄책의 무게를 포함합니다. 죄는 가볍지 않습니다. 죄는 인간의 영혼을 비틀고, 관계를 뒤틀며,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남깁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무거운 죄를 버리려 하지 않고 끌고 다녔습니다. 죄를 놓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우리를 끌고 간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죄를 끌고 갑니다. 미움의 줄, 탐욕의 줄, 자기 의의 줄, 쾌락의 줄을 놓지 못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계획이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알게 할 것이라.” 이것은 믿음의 기다림이 아니라 불신앙의 비웃음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심판하신다면 빨리 해 보라는 식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회개의 기회로 보지 않고, 심판이 없다는 증거처럼 여긴 것입니다. 영적 무감각이 깊어지면 사람은 하나님의 침묵을 은혜로 받지 않고 조롱의 재료로 삼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도 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동안 죄를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 안의 어둠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혜는 죄를 미룰 시간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아올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뒤집힌 양심 (사 5:20)
이사야는 이어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에게 화를 선포합니다. 이것은 죄의 가장 깊은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악을 알면서도 행합니다. 그다음에는 악을 숨깁니다. 더 깊어지면 악을 정당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고, 선을 악이라고 부릅니다. 양심의 이름이 바뀌고, 도덕의 방향이 뒤집히며, 진리의 언어가 파괴됩니다.
본문은 빛과 어둠, 쓴 것과 단 것의 대조를 사용합니다. 빛을 어둠으로, 어둠을 빛으로 삼으며, 쓴 것을 단 것으로, 단 것을 쓴 것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빛”은 오르(אוֹר)입니다. 성경에서 빛은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과 임재를 상징합니다. 반대로 어둠은 하나님을 떠난 혼돈과 죄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단순히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을 빛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판단력의 붕괴입니다.
“악”은 라(רַע), “선”은 토브(טוֹב)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보시며 “좋았더라”, 곧 토브라고 하셨습니다. 선은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선과 악의 기준을 스스로 바꾸려 합니다. 에덴에서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스스로 취했습니다. 하나님께 의존하여 선악을 분별하기보다, 자신이 기준이 되려 한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도 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이 말씀은 낯설지 않습니다. 죄를 자유라고 부르고, 탐욕을 능력이라고 부르며, 교만을 자존감이라고 포장하고, 무관심을 중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거룩을 답답함이라 하고, 순종을 미련함이라 하며, 회개를 자기비하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꾼다고 본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어둠을 빛이라 불러도 어둠은 어둠입니다. 쓴 것을 달다고 말해도 영혼은 결국 병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름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악이라 하신 것을 악이라 부르고, 하나님이 선이라 하신 것을 선이라 부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향한 거친 정죄가 아니라, 먼저 내 마음속 뒤집힌 언어를 바로잡는 회개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교만 (사 5:21)
세 번째 화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에게 향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호크마(חָכְמָה)의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경에서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유다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지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는 지혜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더 신뢰했고, 선지자의 경고보다 자기 계산을 더 확실하게 여겼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는 것은 무지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배울 가능성이 있지만, 자신이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듣지 않습니다. 영적 교만은 귀를 닫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 생각을 확인해 주는 도구로만 듣고, 책망은 남에게 적용하며, 회개의 부름은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지나칩니다.
이사야의 시대 유다는 국제 정세 속에서 생존을 고민했습니다. 앗수르의 위협, 주변 나라들과의 동맹, 군사적 계산이 중요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잃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분석하는 능력은 있었을지 몰라도, 그 현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지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명철은 구원이 아니라 멸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도 지식이 많아질수록 겸손하기보다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학적 언어가 풍부하다고 해서 마음이 낮아진 것은 아닙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작게 보는 능력입니다. “주님, 제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제가 판단하기 전에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십시오.” 이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술에는 용사이나 정의에는 약한 사람들 (사 5:22-23)
다음 화는 술을 마시는 데 용감하고 독주를 잘 빚는 데 유력한 자들에게 선포됩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움에 쓰이지 않습니다. 술잔 앞에서는 용사이나, 정의 앞에서는 비겁합니다. 쾌락과 자기 만족에는 능하지만, 약한 자를 보호하고 바른 판단을 세우는 일에는 무능합니다.
그들은 뇌물로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았습니다. 뇌물은 쇼하드(שֹׁחַד)입니다. 뇌물은 눈을 흐리게 하고 재판을 굽게 합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는 것은 법정의 타락이며, 의인의 공의를 빼앗는 것은 공동체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재판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 속에 드러내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가 돈에 팔렸을 때, 유다는 더 이상 하나님의 공의를 증언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와 신앙인의 삶에도 깊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무엇에 강하고 무엇에 약합니까. 자기 즐거움을 지키는 데는 강하지만, 진리를 위해 손해 보는 데는 약하지 않습니까. 나의 유익을 챙기는 데는 지혜롭지만, 억울한 자의 편에 서는 데는 침묵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힘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이 정의를 섬기지 않을 때, 그 힘은 죄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보다 그 능력의 방향을 보십니다. 말의 능력, 돈의 능력, 지식의 능력, 관계의 능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보십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억울하게 만드는 데 쓰인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화가 되는 능력입니다.
말씀을 버린 자의 뿌리와 꽃 (사 5:24)
이사야는 이제 심판의 이유를 선명하게 밝힙니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모든 죄의 뿌리는 말씀을 버린 데 있습니다. 율법은 토라(תּוֹרָה)입니다. 토라는 생명의 길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길을 버렸습니다. 말씀을 모른 것이 아니라 멸시했습니다.
“멸시하다”는 단순히 싫어한다는 뜻보다 깊습니다. 가치 없게 여기고 가볍게 취급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결정 앞에서 가볍게 여기면 그것이 멸시입니다. 말씀을 읽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욕망과 충돌할 때 쉽게 밀어내면 그것이 멸시입니다. 말씀을 설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 앞에 나 자신을 세우지 않으면 그것이 멸시입니다.
그 결과는 마른 풀과 불꽃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키고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지듯, 그들의 뿌리는 썩고 꽃은 먼지처럼 날릴 것입니다. 뿌리와 꽃은 삶의 보이지 않는 근원과 보이는 아름다움을 함께 가리킵니다. 말씀을 버리면 뿌리가 썩습니다. 뿌리가 썩으면 꽃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삶, 번성한 사회, 종교적 형식이 남아 있어도 뿌리가 말씀에서 끊어지면 결국 먼지처럼 흩어집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의 뿌리를 살펴야 합니다. 내 삶의 깊은 곳은 무엇에 뿌리내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평가와 세상의 유행과 자기 욕망입니까. 꽃을 꾸미는 일보다 뿌리를 살피는 일이 먼저입니다. 뿌리가 말씀에 닿아 있으면 계절이 어려워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썩으면 화려한 꽃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진노하시는 손이 아직 펼쳐져 있다 (사 5:25)
하나님의 진노가 백성에게 향합니다. 산들이 진동하고 시체가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무거운 심판의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말씀을 멸시하며 정의를 뒤집을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진노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절에서 반복되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여움이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 하나님의 손이 펼쳐져 있다는 말은 여기서는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죄가 깊고 회개가 없기에, 하나님의 징계는 계속됩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서 안에서 반복되며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편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면, 악은 결국 무의미하게 방치됩니다. 억울한 자의 눈물도, 뒤집힌 정의도, 멸시당한 말씀도 아무런 최종 판단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한 사랑이 악을 향해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죄를 미워하시고,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그들의 멸망의 길을 흔드십니다.
그럼에도 이 진노의 말씀은 우리를 절망으로만 이끌지 않습니다. 심판의 경고는 아직 들을 시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통해 심판을 듣는 동안 우리는 돌이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심판으로 펼쳐지기 전에, 우리는 은혜를 구하는 손을 들어야 합니다.
먼 나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권 (사 5:26-30)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먼 나라들을 향해 기치를 세우시고 휘파람을 불어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십니다. 그들은 빨리 달려오며 피곤하거나 넘어지는 자가 없습니다. 허리띠가 풀리지 않고 신발끈이 끊어지지 않으며, 화살은 날카롭고 활은 당겨져 있습니다. 말굽은 부싯돌 같고 병거 바퀴는 회오리바람 같습니다. 사자처럼 부르짖고 먹이를 움켜잡아도 건질 자가 없습니다.
이 장면은 앗수르와 같은 제국의 군사적 위협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시대에 앗수르는 고대 근동을 뒤흔들던 강대국이었습니다. 유다는 그 위협 앞에서 두려워했고, 때로는 하나님보다 정치적 계산을 더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더 깊은 현실을 봅니다. 앗수르 같은 강대국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까지 사용하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두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다루시기 위해 역사와 제국과 전쟁의 흐름까지도 사용하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정치와 군사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선지자의 눈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문제입니다. 어둠과 고난이 밀려올 때 우리는 단지 외부의 힘만 탓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의 방향을 물어야 합니다.
마지막 절은 땅을 바라보아도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 어두워진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버린 백성에게 남는 것은 어둠입니다. 빛을 어둠이라 부르고 어둠을 빛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결국 참된 빛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죄의 끝입니다. 죄는 처음에는 밝아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빛을 가립니다.
이사야 5:18-30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뒤집힌 양심과 교만한 지혜, 부패한 정의와 멸시당한 말씀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끌고 다니는 사람,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 악을 선이라 부르는 사람,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사람, 뇌물로 정의를 굽게 하는 사람,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결국 어둠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죄를 드러내시고, 공의로우시기에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복음의 필요를 더 깊이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악의 기준을 바로 세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지혜는 자주 교만이 되고, 우리의 힘은 자주 자기 유익을 향하며, 우리의 양심은 쉽게 뒤집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참빛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둠 속에 비치는 참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악을 선이라 부르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드러내셨고, 불의한 재판으로 정죄받으셨으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은혜가 십자가에서 만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시 선과 악을 배우고, 빛과 어둠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길로 받게 됩니다. 복음은 죄를 덮어 주기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뒤집힌 마음을 다시 바로 세우는 은혜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죄를 끌고 가는 완고함이 있음을 보게 하십시오. 악을 선이라 부르고 선을 악이라 부르는 뒤집힌 마음을 고쳐 주십시오.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교만을 낮추시고, 말씀을 가볍게 여겼던 무감각을 회개하게 하십시오. 참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 양심을 새롭게 하시고, 정의와 공의의 길을 걷게 하십시오. 어둠을 빛이라 부르는 시대 속에서도 주의 말씀을 따라 참된 빛 가운데 살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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