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가지 나는 이다 (에고 에이미)

요한복음의 7가지 Ἐγώ εἰμι

요한복음의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집중한다. 7가지의 기적이나 다른 복음서에 비해 과하게 많은 설교 등은 이것을 반영한다. 또한 신학적 표현 중의 하나님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정확하게 ‘나는~이다’ 형태를 띤 구절은 7번 사용된다. 에고 에이미 용법은 구약의 여호와 (나는 ~이다)의 의미를 가진 야훼, 여호와 존재론적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일곱가지 ‘나는 ~이다’를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여호와

칠십인역은 여호와를 “εγω ειμι“로 번역하여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 LXX 출 3:14 και ειπεν ο θεος προς μωυσην εγω ειμι ο ων και ειπεν ουτως ερεις τοις υιοις ισραηλ ο ων απεσταλκεν με προς υμας

LXX 출애굽기 3장 전문은 이곳에서 확인 바람(Ἔξοδος – Κεφάλαιο 3)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표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에 하신 말씀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에 비유될 수 있다. 광야에 식탁을 베풀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응답하신다. 요한복음은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뒤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반석의 생수 사건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표현을 덧붙이신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정확하게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광야의 떡과 예수님 자신의 ‘떡’과 비교되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먹는 자는 영적으로 주리지 않을 것이다. 즉 영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소개한다. 조상이 먹은 떡은 조상들이 먹고 죽었지만 예수님 떡 즉 말씀을 먹는 자들은 영원히 살리라 소개하신다. 구약의 만나와 참떡이신 예수님은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신다.

  •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요 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후에 주어진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다그치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을 쓰신다. 다시 재촉하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시작 젊은이까지 모두 떠난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자 여자에게 묻는 ‘너는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신 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이 주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생명과 진리,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유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라는 표현이다. 세상은 예수님의 사역의 장소이며, 구원할 타락한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신다. 세상은 악한 자들의 소굴이며,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Nestle 1904)

‘세상의’는 ‘세상에서’ 또는 ‘세상을’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닌, 세상에 있고, 세상을 위한 존재인 것을 드러내신다.

나는 문이다.(10:7,9)

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문은 출입구다. 또한 부여된 자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문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제한된 사람, 출입이 허가된 존재들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즉 양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양이 아닌 다른 동물은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양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이다. 그것은 주인의 목소리로 구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자는 그 문으로 들어갈 것이나,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다음 구절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간 결과에 대한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9-10)

예수님은 문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가를 설명하신다. 먼저는 ‘구원’을 얻는다. 문은 구원의 문이다. 둘째는 ‘꼴’ 즉 양식을 얻는다. 먹을 것이 풍부하다. 이 부분은 문인 동시에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세 번째는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

나는 선한 목자라.(10:11)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직역하면, ‘나는 이다. 그 목자 그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목자로 소개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그러낸다. 선한 목자는 삯꾼 목자와 다르고, 강도와 반대된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목자였지만 강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제사를 빌미로 백성들의 재물을 탐했고, 과부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오히려 양들을 위해 존재한다. 목숨을 바치고, 꼴을 준다.

여기서 선한(καλὸς)이란 단어는 ‘선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유(Rieu)는 ‘나는 아름다운 목자다’라고 번역하도록 권유한다. 요한이 말하는 ‘선한’이란 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롬 7:16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의미다. 딤전 1:8에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율법은 선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딤전 4:6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좋은’이란 단어로 번역했다.

딤전 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좋은 교훈’을 자신이 가르치는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 마태복음 13:24로 넘어가면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가 나온다. 그가 뿌리는 씨앗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8:8에서 ‘더 낫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롬 7:16 νόμῳ ὅτι καλός

딤전 1:8 δὲ ὅτι καλὸς ὁ νόμος

딤전 4:6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καλὸς ἔσῃ διάκονος

영어 성경은 칼로스(καλός)를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beautiful, as an outward sign of the inward good, noble, honorable character; good, worthy, honorable, noble, and seen to be so.) 이러한 의미를 볼 때 ‘좋은’이란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완전한 상태이거나, 흠이 없고, 일반적인 어떤 상태보다 월등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은 양자 삼으신다. 양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방어할 수도 없다. 그들은 느리고, 둔하다. 목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동물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포용으로 가능하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선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나사로의 집에 갔을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한다. 마지막 날에 대한 부활의 확신은 있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생명이다’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 부활과 생명을 하나로 보며, 예수님을 진정한 생명이라고 재선언한다.

  •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1:4은 생명과 빛이 연결된다. 이제 부활과 연결되고,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다. 이로서 생명의 정체가 드러나며,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능력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죽음까지 정복하신 예수님이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강론이 시작되는 곳이다.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강론을 길게 넣는다. 도마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른다고 투덜거린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무엇인가 확실하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 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1장에서 부활과 생명이 만났다면, 14장에서는 생명이 길과 진리와 만난다. 세 개의 정의에 모두 관사(ἡ)가 붙어 있다. ‘내가 그 길이고, 그 진리고, 그 생명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러 개의 길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바로 ‘그 길’이다. 길은 곧 진리와 만나, 예수님의 배타성과 진리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그 진리는 다시 생명으로 나아간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곳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도의 관계를 드러낸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예수님은 농부가 기르는 포도나무다(1,5절) 성도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가지’라고 말씀하신다.(5절) 성도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포도나무이시다.

헬라어 원문은 ‘참’에 관사가 있어, 포도나무와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의 동사를 취함으로 앞선 문장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참’이라는 표현은 다른 거짓된 것과 구분된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거짓된 포도나무, 즉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다른 것과 구분하고 차별화 시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포도나무는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들포도나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하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빈약하다.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릇된 포도나무다.

  • 사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안에 있다’는 표현은 중요하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원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붙어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매 없는 가지(성도)를 잘라 낸다는 말은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선택된 백성이 버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요한은 붙어 있다는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 듯하다. 즉 교회에 있으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라면 그는 심판의 때에 제해질 것이다. 그가 진정한 제자인지는 열매가 보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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