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 1장

요나 1장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십니다. 율법 많은 곳에도 이방인에 대한 배려가 있으며 심지어 이방인의 기도도 들으신다는 구절도 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구약의 경우, 이방인과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동일하게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악을 심판하려 하시지만 엄밀하게 용사하기 위함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보내 그들을 회개 시키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을 알았기 때문에(4:2)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도망가는 요나를 그대로 두지 않고 동풍으로 큰 폭풍을 만들어 괴롭게 합니다. 선원들은 제비로 요나를 뽑고 그를 바다에 던지게 됩니다.

요나 1장 구조

  • 1-3절 요나의 소명과 도피
  • 4-10절 쫓아가시는 하나님
  • 11-16절 바다에 던져지는 요나
  • 17절 물고기 뱃속의 요나

요나 1장 강해

1-3절 소명과 도피

요나는 누구인가?

요나서 안에서는 요나가 ‘아밋대의 아들’ 이라는 정보 외는 그 어떤 정보도 나타나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니느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앗수르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열왕기를 통해 요나가 여로보암 2세 시대의 선지자임을 알게 됩니다. 여로보암 2세의 북 이스라엘은 그 어떤 시기보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 정치력을 지난 시기였습니다. 학자들은 당시가 시리아를 비롯하여 애굽, 앗수르가 어려움을 겪어 권력의 공백 기간이 팔레스타인 주변에 일어났을 때라고 봅니다. 그로 인해 약삭빠른 여로보암 2세는 주변국을 지배하고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됩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함께 손에 쥔 여로보암 2세대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가장 하나님께 범죄 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니느웨로 가라

니느웨는 앗수로의 두 번째 수도입니다. 우리가 알듯 후에 앗수르는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시리아와 가나안 지역까지 점령합니다. 앗수르로 인해 요나의 고국인 북이스라엘도 멸망합니다. 니느웨를 ‘큰 성읍’으로 표현합니다. 4:11에서는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로 말합니다. 크고 거대한 성읍이었지만 안타깝게 그 성은 그들의 악독이 여호와 앞에 상달된 정도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려고 하는 곳은 악독하고 큰 성읍입니다.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앗수르는 포악하기로 소문난 나라였다고 합니다. 후에 징기스칸과 같은 잔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가차 없이 살육하고 전멸시키는 긍휼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나훔과 스바냐에서 조금씩 등장합니다. 그들의 악이 얼마나 심했는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출 2:23에서 등장합니다.

  • 출애굽기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 사무엘상 9:16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소명은 평안한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험하고 어려운 곳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변화 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명의 현장은 고난의 현장이며, 역경의 장소입니다.

도망가는 요나

요나는 자전적으로 읽어야할 지 아니면 누군가 후에 듣고 회상하여 적은 것인지는 모릅니다. 학자들은 대부분 요나가 고향으로 돌아가 회개하는 심정으로 적었을 것이라 말합니다. 즉 자전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에는 요나의 심정, 당시 북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생각을 하지 않고 곧바로 도망갈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요나의 도망에 대해 말이 많지만 너무 어렵게 풀어서는 안 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4:2에서 하나님의 인자함 때문입니다. 즉 적국인 니느웨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실 것을 요나는 알았기 때문에 말씀 자체를 전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요나는 교회와 같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소명을 받은 교회는 요나처럼 악한 니느웨와 같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교회를 멸시하고 무시하고 핍박합니다. 만약 그것이 싫어 교회가 자기끼리만 모이고, 세상을 향하여 입을 다문다면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얼굴

성경에서 여호와의 얼굴은 친밀함, 교제, 임재 등을 상징합니다. 얼굴은 존재의 상징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다는 것을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얼굴’은 히브리어 ‘파님(פָנִים)’으로 표면이란 뜻입니다. 파님은 밖으로 드러난 겉표면을 말하며, 대지, 얼굴, 겉모습 등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신체상징 “얼굴”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우연한 형통, 마침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동쪽 느니웨가 아닌 서쪽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다시스로 가기 위해 욥바항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그곳에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원하는 대로, 생각대로 잘 풀려갑니다. 모든 것이 잘 풀려 간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내가 계획하고 생각한 대로 일이 된다 하여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함정일 수 있습니다.

우연한 형통은 하나님의 도우심일 수 있지만, 멸망으로 가는 욕망의 미끄럼틀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데 형통하다면 더 큰 심판과 멸망으로 나아가는 위험한 징조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 때 다시스로 가는 배가 없었다면 요나는 물고기 뱃속까지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에 올랐더라

원어는 ‘배로 내려 갔더라’1입니다. 요나는 다시 배 밑창으로 내려가고, 다시 바닷속 깊은 곳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대로 행할 때 올라갈 것 같지만 결국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 단어는 역설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욥바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달려갑니다. 그가 보기에 요나는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있고, 성공의 계단을 딛고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요나가 계속하여 내려가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4-10절 쫓아가시는 하나님

큰 바람을 내리시매

원어는 ‘던지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에 쥐고 있던 폭풍을 바다에 던져 버린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사용됩니다. 우리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요 주관자이십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구절이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홍해에 바람을 내리시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 ויהוה הטיל רוח־גדולה אל־הים
  • 그리고 야훼는 보냈다 큰 바람을 (그) 바다에

하나님께서 홍해에 동풍을 불게 하셔서 바다를 가르신 것처럼, 요나가 도망가는 바다 위에 큰 바람을 던지셔서 요동치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주어는 여호와입니다. 모든 자연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을까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보십시오. 그것이 성공이든 불행이든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며, 내 삶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공들이 자기의 신을 부르고

배가 거의 깨어지려 하자 사공들이 두려움에 가득 차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원래 사공들은 종교적입니다. 아직도 승선을 할 때 수많은 배들이 고사를 지냅니다. 무사히 항해를 마칠 수 있도록 신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하지만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그들의 외침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고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신은 가짜 신입니다. 결국 그들은 살기 위하여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합니다. 멀리 떠나는 배들은 돈을 벌기 위해 대부분 무역상품을 많이 싣습니다. 고가의 제품을 사들여 더 고가에 파는 것이죠. 하지만 목숨이 위태로우니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요나는 내려가서

폭풍이 몰아치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을 부르고, 물건을 바다는 던지는 모습을 본 요나는 무슨 생각인지 배 밑창으로 내려갑니다. 요나는 몰랐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배를 한 번 타보고 그런 주장을 하시기 바랍니다. 저런 폭풍에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을까요? 영적으로 완전히 무뎌진 그 안에는 절망과 체념, 그리고 자포자기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무뎌진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게으름과 잠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절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부지런합니다.

선장이 – 자는 자여

요나보다 선장이 훨씬 더 믿음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잠자는 요나를 깨우며,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느냐?’며 야단을 칩니다. 사실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잠을 자는 요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선장이 보기에 너무나 황당한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침체에 빠지면 세상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만큼 이상해 집니다.

제비를 뽑자

아무리 해도 폭풍이 잠들지 않자 뭔가 이상한 감을 느낍니다. 일반 자연 현상이 아니라 어떤 신이 노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들은 결국 제비뽑기를 시작하고 당연히 요나가 뽑힙니다. 고대세계에서 제비뽑기는 항상 신의 영역이었습니다.

  • 여호수아 18:8 그 사람들이 일어나 떠나니 여호수아가 그 땅을 그리러 가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그것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여기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너희를 위하여 제비를 뽑으리라 하니

  • 잠언 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다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요나에게 당합니다. 모든 것이 우연입니다. 욥바에 다시스로 가는 배도 우연히 마침 그곳에 있었고, 우연히 폭풍이 일어났고, 우연히 제비에 뽑혔습니다. 우연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종입니다.

너는 누구냐?

사람들은 요나를 향해 누구냐고 묻습니다. 생업이 무엇이고, 어디서 왔고, 나라와 민족은 무엇이냐? 묻습니다. 그동안 요나는 자신을 숨겨왔지만 한 순간에 드러납니다. 아무리 자신을 숨기려 해도 하나님께서 들추어내시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11-16절 바다에 빠진 요나

결국 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요나를 살려보려 하여 힘을 썼지만 폭풍은 자신들의 힘으로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요나는 그들을 차마 보지 못하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12절)고 조언합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지가 거짓말처럼 바다가 잠잠해 집니다.(15절)

  1. ‘올랐더라’의 히브리어는 야라드(יָרַד)로 내려가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380번 정도 사용되었고, 요나서에서 1:3에서 두번 사용된다. 2:6에서는 변형된 형태로 사용된다. 집에서 욥바로 내려갔고, 욥바에서 배로 내려갔고, 배에서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2:6)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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