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장 강해
[여호수아 2장 구조]
1-7절 두 정탐꾼 라합의 집에 숨다
8-21절 라합의 부탁과 도주
22-24절 두 정탐꾼의 보고
여호수아 2장 강해
정탐꾼을 보내다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너기 전에 두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의아해 보입니다. 모세가 요단을 건너기 전 열두 정탐꾼을 보내 곤욕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건너가면 될 일을 장로들이 그래도 먼저 정탐꾼을 통해 알아보자는 유혹에 넘어간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열 정탐꾼이 불순종하여 이스라엘은 38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광야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여호수아가 왜 정탐꾼을 보낸 걸까요?
여호수아의 의도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단지 정찰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은 여리고에 들어가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라합을 만나다.
놀랍게도 하나님 두 정탐꾼은 여리고성에서 쫓겨 거의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 라합이 나타나 그들을 숨겨줍니다. 하나님은 라합을 예비하심으로 두 정탐꾼을 보호하셨습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정교하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라합의 가족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
라합은 여리고 병사들이 나가자 지붕으로 올라가 숨겨둔 두 정탐꾼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두 정탐꾼이 알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내용이었습니다. 라합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는 단지 소문을 들었음에도 이미 여호와 신앙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 라합의 믿음은 들음에서 났다.
라합의 믿음은 들음에서 났습니다. 그는 ‘우리가 들었음이라’ 말합니다. 듣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2) 라합의 믿음은 지식을 믿음으로 바꾸었다.
두 번째 라합은 들은 사실을 믿음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졌어도 믿음으로 바꾸지 않으면 죽은 지식입니다. 라합은 소문을 통해 들은 지식을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3) 거래하는 믿음
라합은 두 정탐꾼들에게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라합은 거래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거래이며, 믿음의 고백입니다. 유다 자손인 살몬이 라합과 결혼함으로 라합은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생명의 약속
두 정탐꾼은 라합의 거래에 기꺼이 동의하고 한 가지 조건을 내겁니다. 창문에 붉은 줄을 달아서 표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줄을 달지 않으면 누구든지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을 담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피하고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십자가밖에 있다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애굽의 마지막 재앙 땅에 문설주에 피를 바르면 죽음의 천사가 유월하여 살지만 그렇지 않을 때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급습하여 모든 장자를 죽일 것입니다.
2장은 두 정탐꾼과 라합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저는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보낸 것이 라합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라합을 보시고, 그를 구원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2장 주해
1절 싯딤
싯딤은 아카시아를 말한다. 싯딤 골짜기는 사해 동편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1절 두 정탐꾼
두 명은 증인을 의미한다. 확실히 하려는 것이다. 또한 한 명은 두렵지만 두 사람이 함께 가면 서로 의지가 된다. 예수님도 전도자를 파송할 때 항상 두 명씩 보냈다.
1절 기생 라합
기생은 술집 여인이다. 그냥 술만 파는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몸도 팔았다. 그녀는 억지로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프로네’를 사용하여 음란한 여성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왜 믿음의 조상들의 허물을 숨기지 않을까?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모두가 죄인이다.
4절 나는 알지 못하였고
라합의 거짓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 자체가 기독교이 얼마나 답답한 존재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 라합은 거듭나지도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다. 그녀의 거짓말은 너무나 당연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한 그녀의 최선이었다. 또한 라합이 기독교인이었더도 거짓말을 해야 한다. 정직이란 사실이 아니다. 믿음은 현실을 뛰어 넘어야 한다. 믿음은 소망이며, 헌신이다.
10절 우리가 들었다
라합은 가나안 땅 주민들이 간담이 녹았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었다는 것을 들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참으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멀리서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은 듣고 있었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합 외에 누구도 이스라엘에게 항복도 하지 않았다. 믿음을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다.
-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롬 10:14-15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8절 붉은 줄
붉은 줄은 그리스도를 예표할까?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도 예표라할 수 있다. 붉은 줄은 표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사함의 표시다. 기능적인 의미에서 서로 닮아 있다. 상징적인 예표는 아니지만 기능적인 예표는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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