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 ‘창조하다’는 뜻입니다. 복잡한 히브리어 문법 체계로 인해 다양한 의미로 확장되기는 하지만 대게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됩니다.
בָּרָא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칼(Qal) 완료 3인칭 남성 단수로 쓰입니다. 반면 여호수아 17장 15절의 피엘형은 숲을 베어 ‘개간하다’라는 문맥에 놓입니다. 창세기 1:1 여호수아 17:15
끝난 자리에서도 처음을 여시는 하나님
삶에는 도무지 새로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오래된 실패가 마음을 지배하고,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진 듯하며, 세상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우리는 고쳐 보려 애쓰지만, 낡은 습관과 상처는 쉽게 다시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히브리어 בָּרָא는 태초의 우주만이 아니라, 죄로 무너진 마음과 소망을 잃은 백성에게도 새 시작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합니다.
בָּרָא, 바라: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창조
בָּרָא(바라, bara)는 동사 어근 ברא의 칼(Qal) 완료 3인칭 남성 단수 형태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바로 이 형태가 사용됩니다. 기본적으로 ‘창조하다’, ‘존재하게 하다’, ‘새롭게 이루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구약에서 ‘창조하다’라는 의미의 바라가 쓰일 때, 그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인간의 제작 활동과 하나님의 창조를 구별합니다. 인간은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만들고, 다듬고, 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이시며, 없던 것을 있게 하시고 무질서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에는 עָשָׂה(아사, 만들다·행하다), יָצַר(야차르, 빚다·형성하다) 같은 창조 관련 동사도 있습니다. 이 단어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바라는 반드시 ‘무에서’, 야차르는 반드시 ‘이미 있는 재료로’라는 식으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이 각 동사의 의미를 구체화합니다. 또한 바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무에서의 창조’ 교리를 모두 증명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물의 근원이시라는 고백은 창세기 1장의 전체 흐름과 이사야, 시편, 신약의 창조 증언을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같은 자음 배열을 가진 여호수아 17장 15절의 피엘형은 숲을 베어 땅을 ‘개간하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글자 모양이나 어근만 붙들고 모든 본문에 신비한 의미를 덧붙일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의 바라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 생명과 인간을 주권적으로 존재하게 하시는 창조의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혼돈에 질서를 부으시는 창조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일을 단순한 물질의 출현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창 1:2). 이어 하나님은 말씀으로 빛을 부르시고, 물을 나누시며, 땅에 식물과 생물을 내게 하시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십니다.
바라는 창세기 1장 1절, 21절, 27절의 중요한 지점에 나타납니다. 하늘과 땅의 시작, 큰 바다 생물과 날아다니는 생명의 출현,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 그 지점들입니다. 특히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반복합니다. 인간은 우연히 존재한 물질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뜻을 가지고 지으신 존재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존엄을 세웁니다. 남성과 여성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누구도 효율이나 능력, 나이와 소유에 따라 존엄을 잃지 않습니다. 동시에 창조 신앙은 인간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맡기신 세계를 돌보는 청지기입니다. 바라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연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고, 이웃을 도구처럼 대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조차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새 마음을 구하는 창조의 기도
바라는 창세기의 첫 장에서만 울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시편 51편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시 51:10). 여기서 그는 새로운 육체나 다른 인생을 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죄로 더러워진 자기 내면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기도는 인간의 자기 개선에 대한 낙관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씻어 내는 일이 의지의 결단만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압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구합니다. 죄인은 단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새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시편 51편의 기도는 수동적 체념도 아닙니다. 다윗은 죄를 숨기지 않고 인정하며,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바라의 은혜는 회개를 대신하지 않지만, 회개한 자가 새로워질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실패를 부정하지 않되, 그 실패가 우리의 마지막 이름이 되게 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한 마음을 새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포로 된 백성을 다시 지으시는 하나님
이사야서는 바벨론의 위협과 포로의 절망을 바라보는 백성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라고 하시며,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사 43:1). 창조는 과거의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지으셨다는 사실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하실 언약의 근거가 됩니다.
이사야 65장 17절은 바라의 소망을 더 멀리 확장합니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이어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사 65:17–18). 여기서 새 창조는 개인의 마음속 위로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울음과 부르짖음이 사라지고, 수고한 열매를 빼앗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해함과 상함이 그치는 공동체적이고 우주적인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처음의 세계를 버리고 다른 세계를 향해 도피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와 죽음이 훼손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자기 뜻에 따라 새롭게 하시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세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 땅의 상처와 눈물을 아시며, 마침내 새롭게 하실 것을 믿기에 오늘의 삶에서도 진실과 정의와 돌봄을 선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 창조
구약의 바라는 곧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암호가 아닙니다. 그러나 창조와 새 창조의 정경적 흐름은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빛을 얻습니다. 신약은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선포합니다(골 1:16). 요한복음도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이 지음 받았다고 증언합니다(요 1:1–3).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창조주 하나님이 무너진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신 사건입니다. 바울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할 때(고후 5:17), 그는 단순히 기분이 달라졌다는 뜻을 말하지 않습니다.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용서를 받고, 새로운 삶의 질서 안으로 옮겨졌다는 뜻입니다.
이 새 창조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슬픔, 죽음의 현실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마지막 말씀을 이미 시작하셨음을 믿습니다. 이사야가 바라본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으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결론
바라는 우리에게 “너는 네 힘으로 너 자신을 다시 만들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를 지으시고 지금도 새롭게 하실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지나간 실패를 되돌릴 수 없고, 상처 입은 마음을 완전히 고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태초에 빛을 부르시고, 다윗의 정한 마음을 새롭게 하시며, 포로 된 백성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막연히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는 일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의 혼돈을 가져가는 일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구하고, 관계가 무너졌을 때 화해의 길을 열어 달라고 구하며, 세상의 어둠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 창조를 소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창조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의지하여,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 창조주의 선하심을 드러내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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