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장 강해

흩어진 사람들을 따라 복음도 길을 떠나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따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에 회개하지 않고 귀를 막은 채 달려들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때 증인들의 옷을 맡아 주며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긴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은 스데반의 죽음과 사울의 박해가 예루살렘 교회를 뒤흔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큰 박해로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면 초대교회가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의 흩어짐을 복음의 확장으로 바꾸셨습니다. 성도들은 도망한 곳에서 침묵하지 않고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던 복음이 마침내 유대와 사마리아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행 1:8).

빌립은 사마리아로 내려가 그리스도를 전했고, 그 성에는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이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 길로 나아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은 복음이 민족과 지역, 신분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가는 장입니다. 박해가 복음의 길을 막지 못했고, 오랜 적대감도 성령께서 이루시는 하나 됨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버려진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스데반의 죽음과 교회의 흩어짐(행 8:1-4)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돌을 직접 던졌다고 기록되지는 않지만,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맡았고 그의 죽음에 동의했습니다(행 7:58; 8:1). 훗날 이방인의 사도가 될 바울이 이때에는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은 그날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사도들 외에는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본문은 사도들이 왜 예루살렘에 남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성도가 박해를 피하여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위하여 크게 울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하늘의 영광을 보고 주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을 믿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냉정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정직하게 표현하면서도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믿는 소망입니다.

교회는 애통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면 울지 말라”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요 11:35). 성도의 죽음은 천국의 소망 속에서도 슬픈 이별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을 위하여 크게 울었고, 성경은 그 눈물을 불신앙이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려 했습니다. 그는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습니다(행 8:3). 박해는 교회 지도자에게만 향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남녀 성도들까지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정의 안전과 일상의 평온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사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평범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선교는 소수 전문 사역자에게만 맡겨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받은 모든 성도가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흩어지다”는 말은 씨앗을 뿌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박해자들은 성도들을 흩어 놓으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흩어진 성도들은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씨앗이 유대와 사마리아 곳곳에 뿌려졌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박해라는 악을 선하다고 인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데반의 죽음과 사울의 폭력은 분명한 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악은 하나님의 선교를 좌절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한 사람의 책임을 그대로 두시면서도, 그 악을 넘어 자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원하지 않았던 흩어짐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익숙한 자리를 떠나야 하고, 관계가 끊어지며, 계획했던 일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모든 고난의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흩어진 자리에서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계획하지 않은 길을 복음과 은혜의 길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그리스도를 전한 빌립(행 8:5-8)

흩어진 사람 가운데 빌립은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가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 빌립은 일반적으로 사도행전 6장에서 일곱 일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된 빌립으로 이해됩니다. 사도행전 21장 8절도 그를 “일곱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라고 소개합니다.

빌립은 처음에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 문제를 담당하기 위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를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과부들의 식탁을 돌보던 손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손이 되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 더 넓은 사역의 자리로 인도받았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랜 역사적·종교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그리심산을 예배의 중심으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의 신앙과 혈통을 온전하게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왕래를 꺼릴 정도로 깊은 적대감이 있었습니다(요 4:9).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멸하게 하기를 원한 적도 있었습니다(눅 9:51-55).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심판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이웃 사랑을 가르치셨고, 수가성 여인과 대화하며 그 마을에 구원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눅 10:30-37; 요 4:1-42).

이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명령하신 대로 복음이 사마리아에 들어갑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문화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교회의 선교는 자기 문화를 확장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무리는 빌립의 말을 듣고 그가 행하는 표적을 보며 한마음으로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사람들에게서 나가고 많은 중풍병자와 걷지 못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표적은 빌립 개인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증하고, 예수님의 통치가 악한 영과 질병의 권세를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그 결과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행 8:8). 복음은 단지 죽은 뒤 천국에 가기 위한 정보가 아닙니다. 악한 권세에 눌린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소외된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며, 절망의 도시에 기쁨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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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에는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억눌린 사람이 회복되며 공동체에 참된 기쁨이 생깁니다. 성령의 능력을 인간의 성공이나 물질적 번영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은 모든 문제가 사라졌기 때문에 생기는 만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복음에서 나옵니다.

자신을 큰 자라 했던 시몬(행 8:9-13)

사마리아 성에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스스로 큰 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많은 사람이 그를 주목하며 그를 하나님의 큰 능력이라고 불렀습니다(행 8:9-10).

시몬은 사람들의 놀라움과 칭찬을 통하여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그가 실제로 어떤 종류의 마술을 행했는지 본문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의 행동에 오랫동안 미혹되었고, 시몬 자신은 사람들에게 큰 자로 인정받기를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이 믿고 남녀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을 큰 자라 부르던 시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졌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과장된 위대함을 무너뜨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뒤 빌립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빌립을 통하여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행 8:13). 그러나 이후의 행동은 그의 믿음이 아직 크게 왜곡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그리스도 자신보다 기적의 능력에 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본문은 시몬의 최종적인 구원 여부를 명확하게 결론짓지 않습니다. 그가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면서도, 베드로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않고 악에 매여 있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몬의 영원한 운명을 단정하기보다, 외적인 신앙고백과 세례가 언제나 바른 마음을 자동으로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중심에 둘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고, 특별한 은사를 소유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시몬은 마술을 하던 과거의 방식을 버리지 못한 채 성령의 능력도 자신이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했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내 목적에 이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나의 목적과 욕망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삶입니다.

사마리아에도 임하신 성령(행 8:14-17)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의 복음 사역을 의심하여 막으려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지역에서 행하시는 일을 확인하고 그들을 한 교회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이 그들 가운데 내리신 일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행 8:15-17).

이 사건은 성령을 받기 위해 반드시 믿고 세례받은 뒤 일정 기간을 기다렸다가 사도의 안수를 받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순서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다른 회심 사건에서는 믿음과 성령의 선물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고넬료의 집에서는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세례보다 먼저 성령이 임했습니다(행 10:44-48).

사마리아에서 성령의 임재가 사도들이 올 때까지 지연된 정확한 이유를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사건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오랜 분열을 넘어 하나의 교회가 형성되는 구속사적 전환점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만일 사마리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 아무런 연결 없이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다면, 오랜 적대감이 교회 안에서도 지속되어 유대인 교회와 사마리아인 교회로 나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직접 사마리아에 와서 그들에게 안수하고 동일한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사마리아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에 속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임이 드러났습니다.

특별히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과거 요한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마리아 마을에 하늘의 불이 내려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은 원수를 바라보는 제자의 마음까지 변화시켰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뿐 아니라 서로 적대하던 사람들을 한 교회로 묶으십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민족과 지역, 계층과 문화적 차이를 이유로 다른 성도를 배제한다면 성령이 이루시는 하나 됨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차이를 지워 버리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인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서로를 배척하는 담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같은 성령을 받고 같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 한 시몬(행 8:18-25)

시몬은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자신에게도 그 권능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신이 안수하는 사람도 성령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행 8:18-19).

그는 성령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이 소유하여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생각했습니다. 돈을 지불하면 더 높은 종교적 권능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마술사로 살아오면서 힘을 얻고 사용하는 방식이 그의 신앙 이해에도 남아 있었습니다.

후대에는 교회의 직분이나 영적 권한을 돈으로 사고파는 행위를 시몬의 이름에서 유래한 “성직매매”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의 문제는 역사 속 특정한 제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돈과 인맥으로 직분과 영향력을 얻으려 하거나, 헌금을 이용해 교회의 결정을 지배하려 한다면 같은 죄의 뿌리가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시몬을 엄중하게 책망했습니다. 그의 은과 그가 함께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몫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행 8:20-21).

은사는 선물이지 상품이 아닙니다. 헬라어 카리스마(χάρισμα)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χάρις)와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가리킵니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공동체의 유익과 복음의 사명을 위하여 자신의 뜻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악함을 회개하고 마음에 품은 생각을 용서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시몬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엄중한 경고 속에서도 하나님께 돌아올 길을 제시했습니다.

시몬은 베드로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여 경고받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실제로 마음 깊이 회개했는지,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열린 경고로 남습니다. 두려운 결과만 피하고 싶어 하는 것과 죄 자체를 미워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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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선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 직분, 명성과 영향력을 원하면서 정작 마음의 거룩함과 순종은 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8:25). 처음에는 사마리아의 한 성에서 시작된 복음이 여러 마을로 확장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사마리아를 잠시 방문한 뒤 곧 떠난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성령께서 빌립을 광야 길로 보내시다(행 8:26-29)

사마리아 성에서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큰 기쁨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남쪽 길로 가라고 명했습니다. 누가는 그 길이 광야라고 설명합니다(행 8:26).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사마리아의 부흥 현장을 떠나 사람이 드문 광야 길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이유를 묻거나 성과를 계산하지 않고 일어나 갔습니다.

사역의 가치는 사람의 수로만 판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도시의 많은 사람을 위하여 일하시면서 동시에 광야 길을 지나가는 한 사람도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에게는 군중이 더 중요해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한 영혼도 귀합니다.

그 길에서 빌립은 에디오피아 사람인 한 내시를 만났습니다.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였습니다. 당시 “간다게”는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 남쪽 구스 왕국의 왕실 여성을 가리키는 칭호로 이해됩니다. 본문의 에디오피아는 오늘날 국가의 경계와 정확히 일치한다기보다 애굽 남쪽의 누비아·구스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는 높은 지위에 있었고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큰 권한을 가진 관리였지만, 복음 앞에서는 말씀의 뜻을 배우고 구원받아야 할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인지,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인지,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방인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예배하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하여 예루살렘에 왔고, 돌아가는 길에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내시는 당시 신체적 조건과 종교적 규정으로 인해 유대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제약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신 23:1). 그러나 본문은 그가 성전에서 실제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성전에서 쫓겨났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사야서는 장차 구원의 날에 고자도 자신을 마른 나무라고 말하지 않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이름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사 56:3-5). 사도행전 8장에서 한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는 사건은 이 약속을 깊이 떠올리게 합니다.

성령은 빌립에게 병거로 가까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통하여 큰 방향을 알려 주시고, 성령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그 사람에게 접근하게 하셨습니다. 복음 전도는 인간의 계획과 기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준비하시고 말씀을 들을 마음을 여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은 빌립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빌립이 광야 길로 가지 않았다면 내시를 만날 수 없었고, 병거로 가까이 가지 않았다면 대화가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순종을 불필요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여 준비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이 글이 누구를 가리키느냐(행 8:30-35)

빌립은 병거로 달려가 내시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소리 내어 읽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빌립은 그가 읽는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빌립은 그가 읽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는지 물었습니다.

내시는 자신을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대답하며 빌립을 병거에 올라 함께 앉도록 청했습니다(행 8:30-31). 그는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모르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았습니다. 말씀을 이해하려는 갈망과 배우려는 겸손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가 직접 읽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아무런 가르침도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목회자와 교사,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을 세워 성도들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게 하십니다. 우리는 인간 교사의 말을 성경보다 높여서는 안 되지만,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고 고집하며 공동체의 가르침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내시가 읽고 있던 말씀은 이사야 53장 7-8절이었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잠잠하고, 굴욕 속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며, 생명을 빼앗기는 여호와의 종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내시는 이사야가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지 다른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지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이 누구인지에 관한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빌립은 바로 이 성경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8:34-35).

누가는 빌립이 전한 설교의 모든 내용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이사야의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쳤다고 밝힙니다. 빌립은 본문의 문맥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이름만 억지로 끌어온 것이 아닙니다. 죄가 없으면서도 고난받고,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죽음 뒤에 높임을 받는 여호와의 종에 관한 이사야서의 약속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성취되었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받으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억울한 재판을 받으면서도 폭력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만물의 주로 높이셨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흐름은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과 성취에 이릅니다. 율법과 선지자와 약속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며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복음 전도에서도 질문을 존중해야 합니다. 빌립은 내시의 말을 끊고 일방적으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가 읽는 말씀을 들었고, 이해하는지 물었으며, 그가 품고 있던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질문을 경청한 뒤 그 질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기쁘게 길을 가다(행 8:36-40)

빌립과 내시가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내시는 물이 있으니 자신이 세례를 받는 데 무슨 거리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빌립은 병거를 멈추게 했고 두 사람이 물에 내려가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행 8:36-38).

누가는 빌립이 예수님을 전했다고만 요약했지만, 내시가 즉시 세례를 요청한 것을 보면 빌립이 복음과 함께 세례의 의미도 가르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속한 사람이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언약의 표지입니다.

“나를 막는 것이 무엇이냐”는 내시의 질문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중요한 울림을 가집니다. 민족과 출신 지역, 피부색과 사회적 신분, 신체적 조건이 그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은혜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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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모든 차이를 의미 없게 만들지는 않지만, 그 차이를 구원의 장벽으로 삼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신 사람을 문화와 계층, 과거의 상처와 조건을 이유로 밀어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을 허물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 몸으로 부릅니다.

두 사람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습니다. 내시는 더 이상 빌립을 보지 못했지만 기쁘게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의 기쁨은 복음 전도자인 빌립이 곁에 계속 머물러 주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생긴 기쁨이었습니다.

참된 복음 전도자는 사람을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빌립이 사라졌어도 내시는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이사야의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님이 계셨고, 성령께서 그의 길을 동행하셨습니다.

내시가 고국으로 돌아간 뒤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본문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전승이 여러 이야기를 전하지만, 사도행전은 그가 기쁘게 길을 갔다는 사실까지만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에디오피아 교회를 공식적으로 세웠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의 존재 자체가 복음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넘어 더 먼 세계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남쪽 먼 지역에서 온 사람이었고, 왕실의 재정을 맡은 관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빌립을 광야 길로 보내셨습니다. 한 사람에게 전해진 복음이 그가 속한 나라와 삶의 자리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을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빌립은 아소도에서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가며 복음을 전하다가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행 8:40). 아소도는 구약의 블레셋 도시 아스돗과 연결되는 지역입니다. 빌립은 광야의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뒤 다시 여러 성을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빌립을 군중에게도 보내시고 한 사람에게도 보내셨습니다. 사마리아 성에서 큰 역사를 이루게 하시고 광야의 병거 곁에서도 일하게 하셨습니다. 도시와 광야, 다수와 한 사람 가운데 어느 하나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흩어짐을 선교로 바꾸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8장은 스데반의 죽음과 큰 박해로 시작했지만, 곳곳에 복음의 기쁨이 임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흩어졌고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사람들은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박해는 교회의 안전을 무너뜨렸지만 교회의 사명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그 약속의 두 번째 단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교회가 치밀한 선교 계획을 세워 자발적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해로 흩어졌지만, 하나님은 그 흩어짐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이는 박해가 선하다거나 고난을 일부러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슬픈 일이었고 성도들이 집과 공동체를 떠나야 했던 것은 큰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보다 깊고 강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부르지 않으시면서도 악이 자신의 구원 계획을 최종적으로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원하지 않은 변화와 흩어짐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직장을 옮기고, 살던 곳을 떠나며, 익숙했던 관계가 끊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전의 자리를 잃었다는 사실만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롭게 옮겨진 자리에서도 복음과 사랑의 사명을 주십니다. 흩어진 장소가 곧 새로운 선교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은 교회가 넘어야 할 경계가 무엇인지도 보여 줍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랜 적대감이 있었지만 동일한 복음이 전해지고 동일한 성령이 임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던 에디오피아 관리도 광야 길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복음 앞에서 민족과 문화, 지리와 신분의 담은 구원의 장벽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자신과 익숙한 사람만을 위한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언어와 문화, 다른 세대와 계층의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불편하게 여겼거나 멀리했던 사람에게 성령께서 이미 일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과거의 요한이 사마리아에 불이 내리기를 원했다면, 변화된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습니다. 복음은 선교의 대상만 넓히는 것이 아니라 선교하는 사람의 마음도 넓힙니다.

시몬의 이야기는 교회 안에 들어왔다고 모든 욕망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경고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구하면서도 그 능력으로 자신을 크게 만들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직분과 은사, 지식과 재정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소유했는가보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돈이나 공로로 살 수 없습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돌아가고, 받은 은사를 공동체의 유익과 복음 전파를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빌립의 순종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사마리아를 떠나 광야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말씀을 읽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한 사람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여 병거로 가까이 갔고, 내시의 질문을 들었으며, 이사야서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신앙에 관심은 있지만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복음 전도는 언제나 멀리 있는 낯선 사람에게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에 만나게 하신 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의 질문을 듣고 예수님을 설명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억지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준비하신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 그가 품은 질문을 경청하며, 성경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성령께서 이루시지만, 성령은 순종하는 증인의 발과 입술을 사용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는 교회를 잔멸하려 했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울은 성도들을 흩어 버리는 박해자였지만, 하나님은 그마저 복음을 땅끝까지 전할 사도로 바꾸실 것입니다. 교회를 파괴하려 했던 사람이 교회를 세우고, 예수님의 이름을 없애려 했던 사람이 그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흩어진 사람을 증인으로 만들고, 사마리아에 기쁨을 주며, 광야의 한 사람을 찾아가고, 박해자를 사도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흩어졌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흩어짐 속에서도 길을 만드시고, 사람이 없는 것 같은 광야에서도 한 영혼을 만나게 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일어나 가십시오. 낯선 사람과 불편한 경계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이름을 크게 만들려는 욕망을 회개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십시오. 우리가 어디로 흩어지든 그 자리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통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한 자신의 구원 역사를 계속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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