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버린 구원자, 하늘에 서 계신 인자
- 본문: 사도행전 7장 전체
- 핵심 구절: 사도행전 7장 55-56절
사도행전 6장에서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고, 성령의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그의 말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짓 증인을 세워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고 고발했습니다. 공회에 앉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은 대제사장이 그 고발이 사실인지 묻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무죄만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요셉과 모세, 광야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길게 설명합니다. 얼핏 보면 본문과 무관한 역사 강의처럼 보이지만, 그의 설교에는 분명한 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세워지기 전부터 메소보다미아와 애굽과 광야에서 자기 백성에게 나타나셨고,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요셉과 모세 같은 구원자를 반복해서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거절의 역사는 의로우신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인 사건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예수님은 죽음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살리시고 영광 가운데 높이셨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기 직전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은 성전과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면서도 성령을 거역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동시에 땅에서 버림받은 증인을 하늘의 주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위로를 전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에서도 나타나셨다(행 7:1-8)
대제사장이 고발 내용이 사실인지 묻자 스데반은 공회 사람들을 “여러분 부형들이여”라고 부릅니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을 원수처럼 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언약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며 존중하는 태도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존중이 진리를 감추는 침묵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설교가 진행되면서 스데반은 조상들의 불순종과 현재 지도자들의 죄를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머물다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행 7:2-4).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장소입니다. 메소보다미아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영광의 하나님은 이방의 땅에서도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특정한 땅이나 건물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스데반 설교의 첫 번째 단서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시고 허락하신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이 생기기 전부터 살아 계셨고, 성전 밖에서도 자기 백성을 부르시며 인도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증언하는 장소이지 하나님을 가두는 건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발붙일 만큼의 땅도 즉시 유업으로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자식도 없었지만 장차 그와 그의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소유보다 약속을 의지하는 삶이었습니다. 눈앞에는 땅도 자녀도 없었지만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사백 년 동안 종살이와 괴로움을 당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종으로 삼은 나라를 심판하고 백성을 이끌어 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행 7:6-7). 애굽의 종살이와 출애굽은 우연한 민족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고,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이, 이삭에게서 야곱이, 야곱에게서 열두 조상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받은 것은 할례를 받기 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이 먼저였고, 할례는 그 언약의 표지로 뒤따랐습니다.
스데반은 율법과 할례를 모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할례가 가리키는 언약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했습니다. 외적인 표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할례의 참뜻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몸의 표지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등록하며 직분을 가졌다는 사실은 귀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외적인 신앙의 표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적 이력보다 약속하신 하나님을 실제로 믿고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형제들이 버린 요셉을 하나님이 구원자로 세우시다(행 7:9-16)
스데반은 열두 조상의 이야기에서 요셉을 특별히 언급합니다. 조상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고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또한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어 애굽과 바로의 온 집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행 7:9-10).
요셉은 형제들에게 거절당했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제거하면 그의 꿈도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악을 통하여 오히려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섭리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기근이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임했을 때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양식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애굽에 먼저 가 있던 요셉을 통하여 가족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형제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습니다(행 7:11-13).
스데반이 이 이야기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요셉의 생애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형제들이 거절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높여 바로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이 구조는 모세의 이야기에서 반복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님도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배척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죽음에 넘겼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로 높이셨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분이 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동일한 인물이 아니지만, 그의 거절과 높임과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길을 미리 보여 주는 구속사적 모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요셉이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초청했다고 말합니다(행 7:14). 창세기의 히브리어 본문 전통에는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이 칠십 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창 46:27), 고대 그리스어 구약성경인 칠십인역 전통에는 일흔다섯 명으로 계산됩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당시 헬라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그리스어 성경 전통의 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야곱과 조상들은 애굽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받았고, 야곱의 가족은 애굽에서 보호받았습니다. 스데반은 장소가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 보여 줍니다.
교회도 하나님을 특정한 건물과 제도 안에 가두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배당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위하여 구별된 귀한 장소이지만, 하나님이 예배당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정과 일터, 병실과 감옥, 낯선 타국과 고난의 현장에서도 자기 백성과 함께하십니다.
거절당한 모세를 지도자와 속량하는 자로 보내시다(행 7:17-36)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때가 가까워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크게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했고, 아기들을 버려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바로 그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행 7:17-20).
모세는 석 달 동안 부모의 집에서 길러지다가 버려졌지만,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키웠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람을 바로의 권력 중심에서 준비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악한 정책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 형제들을 돌볼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보고 그를 도와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통하여 형제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행 7:23-25).
다음 날 모세가 서로 다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화해시키려 하자 한 사람이 그를 밀치며 누가 모세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고 반발했습니다. 전날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자신도 죽이려 하느냐고 묻자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쳐 나그네가 되었습니다(행 7:26-29).
모세는 자기 백성을 구하려 했지만 백성에게 거절당했습니다. 인간적인 열정과 폭력으로 구원을 이루려던 모세는 광야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패와 도피의 시간을 사용하여 모세를 새롭게 준비하셨습니다.
사십 년이 지난 뒤 시내산 광야에서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 천사가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있는 백성의 고난을 보고 그들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었으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려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행 7:30-3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곳은 예루살렘도 성전도 아닌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서 있는 곳을 거룩한 땅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장소 자체가 본래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성전이 거룩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절했던 바로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 나타난 천사를 통하여 지도자와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습니다(행 7:35).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고 거절했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이 구조는 요셉의 이야기와 동일합니다. 형제들이 버린 요셉을 하나님이 높여 가족을 구원하게 하셨고, 백성이 거절한 모세를 하나님이 다시 보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이 버린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시고 높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행 5:30-31).
스데반은 공회 사람들에게 이 역사를 통하여 질문합니다. 당신들은 조상들이 모세를 거절한 일을 비판하면서, 지금 하나님께서 보내신 더 크신 구원자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아는 것과 그 역사가 가리키는 하나님의 구원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도 과거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거절한 일을 쉽게 비판하면서 현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성경 지식이 많아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조상들의 불순종을 반복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와 선지자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가리킨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받고도 마음은 애굽으로 향하다(행 7:37-43)
스데반은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행 7:37; 신 18:15).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도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예고한 궁극적인 선지자이며 모세보다 크신 구원자입니다.
모세는 광야 교회에서 시내산의 천사와 조상들 사이에 있었고,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했습니다(행 7:38). 여기서 “광야 교회”는 오늘날의 신약 교회와 완전히 동일한 제도를 의미하기보다, 광야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을 가리킵니다. 교회로 번역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부름받아 모인 회중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모세는 생명의 말씀을 받았지만 조상들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거절하고 마음으로 애굽을 향했습니다. 눈앞에서는 애굽을 떠났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애굽의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들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고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제사하며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했습니다(행 7:39-41).
출애굽은 했지만 애굽이 그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몸의 해방이 마음의 믿음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신앙생활의 중요한 위험을 보여 줍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았어도 마음은 여전히 세상의 우상을 향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실제로는 돈과 성공, 인정과 쾌락을 삶의 주인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을 내버려 두어 하늘의 군대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이 광야에서부터 몰록의 장막과 레판의 별을 받들었다고 지적합니다(행 7:42-43; 암 5:25-27). 그들은 겉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에서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는 것은 죄가 가져오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그 욕망을 따라가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습니다. 죄를 마음껏 행할 수 있는 것이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죄의 종이 되는 심판입니다.
스데반의 청중은 자신들이 모세와 율법을 수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모세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모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다르다고 밝힙니다. 조상들은 모세에게서 살아 있는 말씀을 받고도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지도자들도 율법을 자랑하면서 율법이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책을 소유하고 바른 교리를 고백하면서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연구하는 목적은 지식을 쌓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우상을 드러내고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막과 성전보다 크신 하나님(행 7:44-50)
이스라엘 조상들에게는 광야에서 증거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보여 주신 양식대로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후 여호수아가 조상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 성막을 가지고 들어왔고, 다윗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행 7:44-45).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마련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전을 건축한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행 7:46-47). 스데반은 성막이나 성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명령과 섭리 속에서 세워졌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선언합니다(행 7:48). 이는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성전 안에 제한하거나 건물을 소유함으로 하나님의 임재까지 소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스데반은 이사야 66장 1-2절을 인용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고 땅은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인간이 지은 건물에 가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웅장한 건물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으로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사람입니다.
솔로몬도 성전을 봉헌할 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데 자신이 건축한 성전이 어떻게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겠느냐고 고백했습니다(왕상 8:27). 그러므로 스데반의 주장은 성전을 모독한 새로운 사상이 아닙니다. 구약 자체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주권을 선포한 것입니다.
문제는 성전이 아니라 성전을 우상처럼 사용하는 태도였습니다. 백성은 성전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서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성전은 그들을 보호하는 부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도 성전을 의지하면서 불의를 행하는 백성을 책망했습니다(렘 7:4-11).
오늘날의 예배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건물과 오랜 전통은 귀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참된 성전은 그리스도이시며,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건물의 화려함보다 말씀 앞에서 떠는 마음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예배 장소를 소중히 여기되 하나님을 장소 안에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에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평일의 삶을 분리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에서만 우리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일터와 가정, 혼자 있는 방과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행 7:51-53)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한 스데반은 이제 공회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을 적용합니다. 그는 그들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조상들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고 책망합니다(행 7:51).
목이 곧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지 않고 완고하게 자기 길을 고집하는 태도입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했다는 것은 몸에는 언약의 표지가 있지만 내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율법과 성전을 지키는 지도자였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았고 귀는 성령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이 성령을 몰랐다고 말하지 않고 성령을 거슬렀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이제 사도들과 스데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성경을 주신 성령의 증언을 거부했습니다.
스데반은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의로우신 이가 오실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으며, 이제 지도자들은 그 의로우신 이를 배반하고 죽인 사람들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행 7:52). “의로우신 이”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입니다.
그들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습니다(행 7:53). 스데반이 율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음을 고발합니다. 진정한 율법 모독은 율법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의와 구원자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 책망을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정죄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데반 자신도 유대인이었고,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많은 제사장도 믿음에 복종했다고 기록합니다(행 6:7). 스데반의 책망은 특정 민족을 혐오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언약 백성 안에서 반복된 불순종을 지적하는 예언자적 고발입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공회 사람들의 완고함을 비판하면서 같은 죄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교리를 자랑하면서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지적하시는 죄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과 건물을 지키려 하면서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것은 특별하고 신비한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도 계속 회개를 미루는 것,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왜곡하는 것, 하나님의 뜻보다 종교적 체면과 권력을 앞세우는 것이 성령을 거스르는 삶입니다. 성령 충만은 특별한 체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목을 숙이고 마음과 귀를 여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서 계시다(행 7:54-60)
공회 사람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도 마음에 찔렸지만,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며 회개했습니다(행 2:37). 동일하게 마음이 찔렸지만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말씀에 찔릴 때 사람은 회개하거나 분노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은혜의 길이 열리지만, 자존심을 지키려 하면 말씀을 전한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진리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앞에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다고 증언했습니다(행 7:55-56).
“인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자주 사용하신 칭호이며, 다니엘서 7장 13-14절에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하늘의 인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앞에서도 인자가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69). 이제 스데반은 그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봅니다.
신약성경은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환상에서는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순교하는 증인을 맞이하시거나, 그의 증언을 인정하고 변호하시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를 단정적인 교리로 만들기보다, 땅에서 홀로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스데반 곁에 하늘의 주님께서 계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공회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으며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했다고 책망했을 때 이를 거부했지만, 이제 실제로 귀를 막아 말씀을 듣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습니다.
증인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행 7:58). 율법은 사형을 집행할 때 증인들이 먼저 손을 대도록 규정했지만(신 17:7), 사도행전은 이 과정이 정식 재판과 판결을 거쳐 질서 있게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장면은 분노한 무리가 스데반을 끌어내어 죽이는 폭력적인 처형의 성격을 보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사울이 등장합니다. 그는 직접 돌을 던졌다고 기록되지는 않지만, 증인들의 옷을 맡았고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습니다(행 8:1).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바울이 이때에는 복음의 증인을 죽이는 자들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사도행전은 이후에 보여 줍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으면서 주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받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신 기도와 닮았습니다(눅 23:46). 스데반은 예수님을 단지 과거의 선생으로 기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받아 주시는 살아 계신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이 기도도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눅 23:34). 스데반은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성령 충만은 논쟁에서 상대를 이기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성령께서는 스데반으로 하여금 진리를 타협하지 않게 하셨고, 동시에 원수를 향한 사랑을 잃지 않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이 말을 하고 잠들었습니다. 성경이 그의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한 것은 죽음이 가볍거나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이 최종적인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든 사람이 다시 깨어나듯,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는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입니다.
성전 밖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영광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복음의 실패를 기록한 장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땅의 법정에서 정죄받았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의로운 증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공회는 그를 성전과 율법을 모독한 사람으로 판단했지만, 하나님은 하늘을 열어 자신의 영광과 인자를 보여 주셨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하나님이 성전 밖에서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애굽에서 요셉과 함께하셨으며,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성막과 성전을 허락하셨지만 그 안에 갇히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며 땅은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교회 건물과 종교 행사 안에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일예배에서만 우리의 주님이 아니십니다. 일터와 가정, 여행지와 병실, 실패와 고난의 자리에서도 주님이십니다. 예배당에서 경건하게 행동하면서 일상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다면 성전을 의지하면서 말씀을 거역했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또한 인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반복해서 거절해 왔음을 보여 줍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렸고, 모세는 백성에게 거절당했으며, 선지자들은 박해받았습니다. 마침내 의로우신 예수님도 자기 백성의 지도자들과 로마 권력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거절이 하나님의 구원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요셉을 높여 가족을 살리셨고, 거절당한 모세를 다시 보내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만물의 주로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버린 돌을 구원의 머릿돌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과거의 불순종을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음과 귀를 열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신앙의 전통과 직분, 성경 지식과 봉사 경력을 자랑하면서 실제로 성령을 거스르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죄를 찌를 때 분노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변명하고 귀를 막기보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회개는 패배가 아니라 생명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며 말씀 앞에 떠는 사람을 돌보십니다(사 66:2).
스데반은 땅에서 아무런 구원을 얻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감옥 문이 열리지 않았고, 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더 큰 하늘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가 바라본 것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를 맞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신앙은 고난이 사라질 때까지 견디는 기술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증인의 고난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땅의 법정에서 억울하게 정죄받은 성도를 하늘의 주님께서 알고 계시며, 그의 영혼을 받아 주십니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그의 증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 뒤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고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집니다. 그러나 흩어진 사람들은 숨기만 하지 않고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합니다(행 8:1-4). 박해는 교회를 흩었지만 복음까지 흩어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예루살렘 밖으로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기던 사울은 훗날 다메섹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됩니다. 스데반은 생전에 사울의 회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복음과 원수를 위한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뿌린 말씀의 씨앗이 언제 어떤 사람의 삶에서 열매를 맺을지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우리가 만든 틀 안에 가두지 마십시오. 종교적 외형을 의지하면서 말씀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의로우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이 죄를 드러낼 때 귀를 막지 말고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고난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땅의 사람들이 우리를 버려도 하늘의 주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진리를 전하되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억울함 속에서도 예수님의 용서를 나타내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하여 말씀을 담대히 증언하고, 우리의 영혼과 마지막 순간까지 주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사람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쫓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증언을 예루살렘 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돌에 맞아 잠든 한 증인을 통하여 복음은 유대와 사마리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땅에서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멈춘 것처럼 보였지만, 하늘에 서 계신 인자는 그 증언을 수많은 사람의 입술로 이어 가셨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순교를 넘어 전진하는 하나님의 복음이며,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는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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