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사랑이 함께 자라는 교회
- 본문: 사도행전 6장 전체
- 핵심 구절: 사도행전 6장 7절
사도행전 5장에서 교회는 안팎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안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위선이 공동체의 거룩함을 위협했고, 밖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붙잡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하며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는 교회가 성장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빠지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착오에 머물지 않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성도들 사이의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사도들은 불평을 억누르거나 구제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전체를 불러 문제를 드러내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꾼들을 세워 말씀 사역과 구제 사역이 함께 온전하게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왕성해지고 제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으며, 세워진 일꾼 가운데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혜를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짓 증인을 세워 그를 공회로 끌고 갔습니다. 사도행전 6장은 성장하는 교회가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직분과 사역을 어떤 기준으로 맡겨야 하는지, 말씀과 돌봄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또한 충성스러운 섬김이 반드시 세상의 인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더 큰 복음 증언과 고난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성장하는 교회 안에서 원망이 생기다(행 6:1)
사도행전 6장은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 널리 전파되고 믿는 사람이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이며 기뻐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수적 성장은 새로운 문제도 가져왔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필요가 다양해지고, 행정은 복잡해지며, 기존의 방식으로는 모든 사람을 세심하게 돌보기 어려워집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모든 문제가 자동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장은 문제의 소멸이 아니라 문제의 성격을 바꾸기도 합니다. 작은 공동체에서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필요가 큰 공동체에서는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도자 몇 사람이 모든 성도를 직접 돌보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의도하지 않은 소외와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유대적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언어와 문화적 환경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헬라파 유대인은 디아스포라 지역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에 온 헬라어 사용 유대인으로, 히브리파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람어나 히브리어적 전통을 중심으로 살아온 유대인으로 이해됩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같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었다고 해서 오랫동안 형성된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빠지는 일이었습니다(행 6:1). 당시 과부는 경제적으로 매우 취약한 위치에 놓이기 쉬웠습니다. 가족이나 친족의 보호가 없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사회적 영향력도 거의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특별히 돌보라고 반복해서 명령합니다(신 10:18; 24:17-21). 초대교회도 이 말씀의 정신을 따라 어려운 과부들에게 매일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본문은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진 원인이 의도적인 차별이었는지, 행정적 누락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파 성도들이 고의로 헬라파 과부들을 차별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의도가 없었다고 해서 실제로 발생한 소외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헬라파 과부들이 계속 구제에서 빠졌고, 그로 인해 원망이 생겼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교회 안의 갈등을 다룰 때 우리는 의도만을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뜻은 아니었다”는 말로 실제 상처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특정한 사람이 반복하여 소외되었다면 공동체는 그 구조와 방식을 살펴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공동체의 제도와 자원 배분도 공정하게 만들도록 요구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원망을 무조건 불신앙적인 불평으로만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원망이라는 표현에는 공동체를 향한 불만이 담겨 있지만, 그들이 제기한 문제에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숙한 교회는 불평의 표현만 문제 삼아 입을 막지 않고, 그 불평 속에 해결해야 할 정당한 필요가 있는지를 살핍니다.
말씀의 사역과 식탁의 사역(행 6:2-4)
열두 사도는 모든 제자를 불러 모았습니다. 사도들은 문제를 감추거나 일부 지도자들끼리 은밀하게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모든 제자 앞에서 상황을 밝히고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요한 결정이 책임 있고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 줍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행 6:2). 이 말씀을 사도들이 구제와 식탁 봉사를 하찮게 여겼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과부들을 돌보는 일이 중요하지 않았다면 별도의 일꾼을 세워 책임 있게 맡길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구제나 봉사를 가리키는 중요한 말은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입니다. 사도행전 6장 1절의 “매일의 구제”도 봉사와 섬김을 뜻하는 말이며, 4절의 “말씀 사역”에도 같은 계열의 단어가 사용됩니다. 식탁을 섬기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은 본질적으로 모두 하나님과 공동체를 위한 봉사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6장은 말씀 사역은 영적이고 구제 사역은 세속적이라는 이분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만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고, 재정을 정직하게 관리하며, 소외된 사람을 살피는 것도 성령께서 맡기신 거룩한 사역입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동시에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고, 그 말씀을 가르치며, 기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구제 업무 전체를 직접 맡느라 말씀과 기도를 소홀히 한다면 교회는 또 다른 방식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역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은 덜 중요한 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맡겨진 일을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구제 사역을 폐지하지 않고 신뢰할 만한 일꾼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힘쓰기로 했습니다. 두 사역이 경쟁하지 않고 서로를 세워 주도록 질서를 마련한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돌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만 강조하면서 굶주린 사람과 소외된 이웃을 외면하면 복음의 사랑을 삶으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구제와 사회적 봉사에만 몰두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지 않으면 교회 고유의 사명을 잃게 됩니다. 말씀 없는 봉사는 복음의 중심을 잃기 쉽고, 봉사 없는 말씀은 사랑의 열매를 잃기 쉽습니다.
기도와 말씀 사역이 함께 언급된 것도 중요합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만 말하지 않고 기도하는 일에 힘쓰겠다고 했습니다. 설교자가 기도하지 않으면 말씀을 자신의 지식과 기술로 다루게 됩니다. 기도는 말씀 사역자가 자신이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말씀을 맡은 종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목회자와 교회의 지도자는 모든 일을 직접 해야 충성스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책임을 혼자 붙들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못하면 공동체의 은사를 막고, 자신에게 맡겨진 핵심 사역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위임은 책임 회피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 주신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는 지혜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꾼을 세우다(행 6:3-6)
사도들은 형제들에게 일곱 사람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요구된 조건은 세 가지였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칭찬받고, 성령이 충만하며,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행 6:3).
첫째,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그의 성품과 삶이 검증되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제 사역은 음식과 재정을 다루고, 취약한 사람들의 필요를 판단하며, 서로 다른 집단 사이에서 공정하게 일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능력만 있고 인격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둘째,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식탁을 돌보고 재정을 관리하는 일에도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교회 행정을 단순한 기술적 업무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돈과 사람을 다루는 일에는 탐욕과 편견, 인정 욕구가 개입하기 쉽습니다.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으면 봉사가 권력이 되고, 재정 관리가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셋째,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지식이 많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판단하고, 서로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며, 공정하고 실제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내는 능력입니다. 선한 마음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봉사에는 성령의 열심과 더불어 구체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직업을 맡길 때는 능력과 전문성을 꼼꼼히 살피면서, 교회의 직분과 봉사는 아무나 맡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봉사일수록 정직과 책임감, 영적 성숙이 필요합니다. 작은 일을 맡았을 때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 큰 직분을 맡는다고 갑자기 충성스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온 무리는 사도들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선택했습니다(행 6:5). 이들의 이름이 모두 헬라식 이름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헬라파 공동체와 밀접한 배경을 가졌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다만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인이 모두 헬라파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니골라는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이라고 소개됩니다. 그는 본래 이방인으로 태어났지만 유대교로 개종했고,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까지 책임 있는 일꾼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복음이 민족적 경계를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일곱 사람 가운데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특별히 소개됩니다. 빌립도 이후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로 나타납니다(행 8:5-40). 이들은 구제를 담당하도록 선택되었지만 식탁 봉사에만 갇힌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말씀과 선교의 사역에도 사용하셨습니다.
사도행전 6장의 일곱 사람을 교회 역사에서 집사 직분의 기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이들의 사역은 이후 집사 직분의 중요한 원형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은 이들을 직접 “집사”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집사 제도와 세부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고 단정하기보다, 교회의 구제와 실무를 책임 있게 맡은 공인된 일꾼들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선택된 사람들은 사도들 앞에 섰고, 사도들은 기도한 뒤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 안수는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성령이나 능력을 전달하는 마술적 행위가 아닙니다. 공동체가 그들을 공적인 일꾼으로 인정하고, 사명을 맡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행위입니다. 선택에는 공동체가 참여했고, 사도들은 기도와 안수로 그 선택을 확인했습니다.
이 과정에는 공동체의 참여와 지도자의 책임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일방적으로 사람을 지정하지 않았고, 무리도 사도적 질서를 무시하여 독자적으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이 합당한 사람을 선택하고 사도들이 그들에게 사명을 맡겼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지도력과 공동체 참여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책임 있게 협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가다(행 6:7)
일곱 일꾼이 세워진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욱 많아졌고, 많은 제사장도 믿음에 복종했습니다(행 6:7).
누가는 단순히 교회 조직이 안정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내부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고 각 사람에게 적절한 사역을 맡기자 말씀의 전파가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행정과 조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이 막힘없이 전해지도록 섬기는 수단입니다.
교회의 조직이 아무리 정교해도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돕지 못한다면 재검토해야 합니다. 반대로 조직과 행정을 무조건 비영적인 것으로 여기면 공동체의 필요가 방치되고 말씀 사역도 혼란을 겪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무질서를 영성이라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은사를 따라 사람을 세우고, 책임을 나누며, 교회가 질서 있게 사명을 감당하도록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했다”는 표현은 사도행전의 독특한 관점을 보여 줍니다. 말씀은 사도들의 입술을 통하여 전해지지만, 말씀의 성장은 사도 개인의 능력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확장하십니다.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은 단순한 참석자의 증가보다 “제자”의 증가를 말합니다. 교회의 참된 성장은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의 숫자만 늘어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분을 따르며, 삶으로 순종하는 제자가 많아지는 데 있습니다.
많은 제사장이 믿음에 복종했다는 기록은 놀랍습니다. 앞 장에서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 계열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제사장이 복음을 적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제사장 집단 안에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누가는 특정 집단 전체를 선하거나 악하다고 단순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종교 지도자 가운데 복음을 대적한 사람도 있었지만,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믿음에 복종한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출신과 직업과 소속 집단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가장 완고해 보이는 공동체 안에서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에 복종한다”는 표현은 믿음이 단순히 어떤 사실에 동의하는 지적 태도만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은혜로 얻는 구원과 순종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지만, 구원받은 믿음은 반드시 순종의 열매를 맺습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스데반(행 6:8-10)
일곱 사람 가운데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백성 가운데 행했습니다(행 6:8). 사도행전 5장에서는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는데, 이제는 사도가 아닌 스데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는 모든 성도가 스데반과 동일한 방식으로 표적을 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데반의 표적은 복음이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는 중요한 시기에 그의 증언을 확증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데반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은 처음에 과부들을 위한 구제를 담당할 일꾼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행정과 구제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논쟁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맡은 직분이 그 사람의 모든 은사를 제한하는 울타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은사도 공동체와 복음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때 자유민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들이 스데반과 논쟁했습니다. 본문은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기록합니다(행 6:9). 이들이 하나의 회당에 속했는지 여러 회당에 속했는지는 문장 구조상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자유민”은 일반적으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사람이나 그 후손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구레네와 알렉산드리아는 북아프리카 지역과 연결되고, 길리기아와 아시아는 소아시아 지역과 연결됩니다. 스데반 자신도 헬라어와 헬라 문화에 익숙한 배경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언어와 문화가 가까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길리기아의 대표적 도시 다소는 훗날 바울이 되는 사울의 고향이었습니다(행 21:39). 그러나 사도행전 6장은 사울이 이 논쟁에 직접 참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울이 이때 스데반과 논쟁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는 다음 장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사울을 스데반의 죽음과 관련하여 처음 등장시킵니다(행 7:58).
회당 사람들은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박해자들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1:14-15). 스데반의 지혜는 논쟁 기술이나 지식의 양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였습니다.
성령으로 말한다는 것은 아무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7장의 설교를 보면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구약성경의 흐름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성령의 지혜는 성경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적절하게 선포하도록 지성과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논쟁에서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진리 앞에 굴복하기보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제거하려 한 것입니다. 인간은 논리적인 반박이 불가능해지면 인격을 공격하거나 거짓 소문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바른 말만 준비할 것이 아니라 오해와 비방을 감당할 믿음도 준비해야 합니다.
거짓 증언과 공회의 심문(행 6:11-14)
스데반의 지혜를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은 몇몇 사람을 매수하거나 은밀히 충동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주장하게 했습니다. 이어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을 붙잡아 공회로 끌고 갔습니다(행 6:11-12).
스데반에 대한 반대는 처음부터 공회의 재판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논쟁에서 밀린 사람들이 거짓 증인을 세우고 여론을 자극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습니다. 거짓은 진실한 토론을 포기한 자리에서 선동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4장과 5장에서 사도들을 지지하던 백성이 이번에는 스데반을 붙잡는 일에 동원됩니다. 군중의 평가는 언제나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분명한 사실보다 자극적인 소문에 흔들릴 수 있고, 어제 칭찬하던 사람을 오늘 정죄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이 거룩한 곳인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고 고발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 준 관습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행 6:13-14).
이 고발은 완전히 무관한 내용을 새로 만들어 낸 거짓이라기보다 스데반이 전한 복음의 일부를 왜곡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눅 21:5-6),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성전의 언어로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요 2:19-21).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스데반이 하나님이나 율법을 모독한 것은 아닙니다. 스데반은 이어지는 설교에서 아브라함과 요셉, 모세와 다윗, 솔로몬의 역사를 충실하게 설명합니다. 그가 비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을 받으면서도 계속 거역했던 백성의 완고함과, 하나님을 성전 건물 안에 제한하려는 잘못된 태도였습니다.
스데반에 대한 고발은 예수님이 받으신 고발과 유사합니다. 예수님의 재판에서도 거짓 증인들이 성전에 관한 말씀을 왜곡하여 고발했습니다(막 14:55-59). 스데반은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예수님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리스도의 능력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오해받지 않기 위해 복음을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오해를 자초할 만큼 거칠고 부정확하게 말해서도 안 됩니다.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전하되, 우리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 때문에 고난받는 것과 경솔한 표현 때문에 비판받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은 스데반의 얼굴(행 6:15)
공회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했습니다. 그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행 6:15). 누가는 스데반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거짓 고발과 심문 속에서도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음을 증언합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표현은 단순히 온화하거나 아름다운 표정을 지었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서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존재입니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세움 받은 증인으로 서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 얼굴에 광채가 났던 모세를 떠올리게 합니다(출 34:29-35). 스데반은 모세를 모독했다는 혐의로 고발받았지만, 그의 얼굴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누가가 이 연관성을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본문의 문학적 역설은 분명합니다. 모세를 모독한다고 고발받은 사람에게 모세를 연상시키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표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곧 긴 설교를 한 뒤 성 밖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고난을 제거하는 방식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고난의 한가운데서 증인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드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은 상황이 좋아졌을 때 나타나는 평안이 아닙니다. 거짓말과 위협에 둘러싸여 있어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심을 믿고 진리를 증언하는 담대함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상대를 저주하거나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증언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도 오해와 비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반응이 우리가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히면 복음의 성품을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온유함을 잃지 않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말씀과 식탁을 함께 지키는 교회
사도행전 6장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불평으로 시작하여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서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매일의 구제에서 빠진 과부들의 문제였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운 일꾼 가운데 스데반이 복음의 증인으로 일어나면서 사도행전의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문제까지 복음의 전진을 위한 기회로 사용하십니다. 과부들의 소외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꾼을 세우자 말씀은 더욱 왕성해졌습니다. 인간의 실수와 한계가 하나님의 선교를 중단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가 회개하고 질서를 바로 세울 때 그 과정을 통하여 더 넓은 사역의 문을 여셨습니다.
교회는 성장 자체를 성공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많아졌다는 사실만으로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장 과정에서 누가 소외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언어와 문화, 경제적 형편, 나이와 성별, 교육 수준과 출신 지역 때문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을 살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의 문제는 과부들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힘 있는 사람의 요구는 쉽게 들리지만, 약한 사람의 고통은 공동체의 관심에서 빠질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강한 사람의 목소리만 듣지 않고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을 찾아 돌봅니다.
교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무조건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불평의 표현은 성숙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 안에 해결해야 할 실제적인 불의와 소외가 있는지 들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선한 의도를 변명하기보다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동시에 성도는 불만을 소문과 편 가르기로 키우지 말고 공동체가 바른 해결책을 찾도록 참여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모든 제자를 불러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루었고, 온 무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선택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문제를 숨기지 않지만 문제를 이용해 서로를 공격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말씀과 식탁을 함께 지켜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 사역에 충실하면서도 가난한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구제와 봉사를 힘쓰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일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과 사랑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바르게 선포된 말씀은 사랑의 섬김을 낳고, 진실한 섬김은 말씀의 능력을 삶으로 드러냅니다.
일꾼을 세울 때에도 세상과 다른 기준이 필요합니다. 능력과 경력만으로 사람을 선택하지 말고 공동체 안에서 신뢰받는지,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는지, 실제적인 지혜가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작은 재정과 식탁을 맡는 일에도 거룩한 인격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일은 크고 작은 것으로 나뉘기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로 나뉩니다.
스데반은 과부들을 섬기기 위해 세워졌지만 그 자리에서 그의 사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했고, 성령의 지혜로 논쟁했으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고난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충성하는 사람을 더 넓은 증언의 자리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맡은 일이 작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도 성령과 지혜로 감당하십시오. 식탁을 돌보는 일과 재정을 관리하는 일, 병든 사람을 방문하고 외로운 성도를 살피는 일도 하나님 나라의 귀한 사역입니다. 충성의 가치는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아브라함부터 솔로몬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며, 조상들이 하나님의 구원자를 반복하여 거부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는 성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사람이 지은 건물 안에 가둘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인자가 하나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고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은 복음의 패배가 아닙니다. 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고,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행 8:1-4). 예루살렘 안에 머물던 복음이 스데반의 증언과 순교를 통하여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과 사랑이 함께 자라는 교회를 이루십시오. 소외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문제를 정직하게 드러내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꾼을 세우십시오. 기도와 말씀을 소홀히 하지 말고, 식탁과 구제의 사역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맡겨진 자리에서 신실하게 섬기고, 복음을 전할 기회가 열릴 때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십시오.
성령께서는 교회의 문제를 외면하게 하지 않으시고 지혜롭게 해결하게 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입술과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손을 함께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거짓 증언과 박해 속에서도 증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십니다. 이러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점점 왕성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새로운 경계를 넘어 땅끝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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