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은 무너지고 복음은 멈추지 않는다
- 본문: 사도행전 5장 전체
- 핵심 구절: 사도행전 5장 29절
사도행전 4장은 박해 속에서도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고, 한마음과 한뜻으로 소유를 나누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의 헌신은 사람의 칭찬을 얻기 위한 연출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가 낳은 자발적인 나눔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5장은 바나바와 정반대의 마음을 가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들도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지만, 실제 헌신보다 더 헌신적인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종교 권력이 복음을 위협하고 있었고, 교회 안에서는 위선과 거짓이 공동체의 거룩함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외부의 박해보다 더 위험한 것은 내부의 거짓입니다. 박해는 교회를 흔들 수 있지만 위선은 교회의 영혼을 부패시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엄중하게 심판하심으로 교회가 사람의 명예욕을 충족시키는 장소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공동체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5장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고, 믿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주의 사자가 문을 열었습니다. 공회가 다시 예수님의 이름을 금하자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매를 맞고 위협을 받았지만 그들은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속이려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4)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는 소유를 팔았습니다. 아나니아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으며, 삽비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사도행전 4장의 바나바가 행한 일과 비슷합니다. 둘 다 소유를 팔았고 그 값을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그 마음의 동기를 보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땅값 일부를 자신들을 위하여 남겨 둔 것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땅이 팔리기 전에도 그들의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값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행 5:4). 초대교회의 재산 나눔은 강제적인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소유를 전부 팔아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를 남겨 두면서도 마치 전부를 바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자신들이 실제로 드린 것보다 더 많이 드린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헌신의 실체보다 헌신적인 사람이라는 명성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탐욕과 거짓, 위선과 명예욕이 결합된 죄였습니다.
본문에서 “감추다”라고 번역된 말은 노스피조마이(νοσφίζομαι)로, 자기 몫으로 몰래 떼어 두거나 횡령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돈의 일부를 남겼다는 데만 있지 않고, 하나님께 바쳤다고 나타낸 것을 몰래 자기 것으로 돌리며 공동체를 속였다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사탄이 그의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게 했다고 말합니다(행 5:3). 사도행전 4장에서 성도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의 마음은 성령의 다스리심이 아니라 사탄의 거짓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이 보여 주는 두 종류의 충만함입니다. 무엇이 마음을 채우느냐에 따라 사람의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사탄이 그의 마음에 역사했다는 사실이 아나니아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는 동시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고 묻습니다. 사탄의 유혹이 있었지만 아나니아는 그 유혹을 받아들여 거짓을 계획했습니다. 성경은 악한 영의 활동과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앞에서는 성령을 속였다고 말하고, 이어서는 하나님께 거짓말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이 단순한 힘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성령을 속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나니아는 사도들과 공동체를 속이면 하나님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선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잊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만 중요하게 여기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적 위선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기도하고, 헌신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봉사하며, 사람의 칭찬을 얻기 위해 구제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렸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경건해 보이는가보다 그 경건이 진실한가를 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임한 심판(행 5:5-11)
아나니아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나니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 심판으로 제시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약 세 시간 뒤 삽비라가 남편에게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한 채 들어왔습니다. 베드로는 그 땅을 판 값이 그들이 가져온 금액 전부인지를 물었습니다. 이는 삽비라에게 진실을 말할 기회가 주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편과 약속한 거짓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베드로는 두 사람이 함께 주의 영을 시험하려 했다고 책망했습니다. 성령께서 정말 그들의 거짓을 아시는지, 거짓말을 하고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는지를 시험한 것입니다. 삽비라도 즉시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었고, 젊은 사람들이 그를 남편 곁에 장사했습니다(행 5:7-10).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한 심판은 매우 엄중하여 현대 독자에게도 두려움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거짓말을 이와 같은 즉각적인 죽음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도 거짓말을 하고 즉시 죽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또한 본문은 이 사건을 오늘날 교회가 죄인을 물리적으로 처벌해야 하는 근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교회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거룩함을 특별한 방식으로 지키신 사건입니다. 구약에서도 성막 예배가 시작될 때 나답과 아비후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다가 심판받았고(레 10:1-3), 약속의 땅에 들어가던 때에는 아간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감추었다가 심판받았습니다(수 7:1-26). 사도행전 5장은 이러한 사건들을 연상시키며, 새 언약의 교회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영원한 구원 여부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최종 운명을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그들의 죽음 이후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가 개역개정 본문에 처음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곳도 사도행전 5장 11절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임재 앞에 모인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라는 말은 하나님이 죄를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거짓을 묵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가볍게 만드는 값싼 용서가 아니라 죄인을 거룩한 삶으로 부르는 능력입니다. 은혜가 깊을수록 우리는 죄를 더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 완전한 사람만 있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교회는 죄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문제는 연약함 자체가 아니라 죄를 숨기며 경건한 사람으로 가장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는 사람을 용서하시지만, 자신의 위선을 신앙으로 포장하는 태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증언을 확증하시다(행 5:12-16)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심판 이후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많은 표적과 기사가 백성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솔로몬의 행각에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교회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더욱 거룩하게 하고 사도들의 증언을 확증했습니다.
본문은 다른 사람들이 감히 그들과 상종하지 못했으나 백성이 그들을 칭송했다고 기록합니다(행 5:13). 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심판을 본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교회에 끼어들기를 두려워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호기심이나 사회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쉽게 소속할 수 있는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공동체라는 경외심이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주를 믿는 남녀의 수는 더욱 많아졌습니다(행 5:14). 두려움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이 증가했습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분명히 한다고 반드시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고 기준을 낮추는 것이 참된 교회 성장의 길도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거룩함과 복음의 능력을 통하여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십니다.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을 거리로 데리고 나와 침대와 요 위에 눕혔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베드로의 그림자 자체가 병자를 고쳤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만큼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의 그림자를 신비한 물건이나 독립적인 치유 능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치유의 주체는 베드로나 그의 그림자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병자를 걷게 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행 3:12-16).
예루살렘 주변 여러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왔고 그들이 모두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에게 눌린 자들이 해방되었던 것처럼,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자신의 구원 사역을 계속하셨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복음과 분리된 볼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며 사도들의 부활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했습니다. 또한 장차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질병과 악한 영의 권세가 사라질 것을 미리 보여 주는 표지였습니다.
이 사건을 오늘날 모든 성도가 사도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병자를 고쳐야 한다는 보편적인 약속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의 표적에는 사도적 증언을 확증하는 독특한 구속사적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늘도 병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의료와 돌봄을 제공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회복시키실 것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감옥의 문을 열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다(행 5:17-25)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던 사두개인의 당파는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사도들이 행한 선한 일과 백성의 칭송이 지도자들에게 회개의 계기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질투와 적대감을 일으켰습니다.
시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도 기뻐하지 못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질 때 자신의 권위가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은혜의 역사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욕망이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갇힌 밤에 주의 사자가 감옥 문을 열어 그들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라고 명했습니다(행 5:19-20). 하나님께서 감옥 문을 여신 목적은 사도들이 위험을 피하여 숨어 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 가르쳤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직후 안전한 곳으로 피하지 않고 자신들을 체포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바로 그 장소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무모한 객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공회는 사도들이 여전히 감옥에 있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경비병들도 문 앞을 지키고 있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은 이 일이 어떻게 될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와서 갇혔던 사람들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다고 알렸습니다.
이 장면은 인간 권력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몸을 감옥에 넣고 문을 잠그며 경비병을 세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면 인간이 닫은 감옥도 복음의 길을 막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다 갇힌 모든 사람을 기적적으로 석방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야고보는 순교하고 베드로는 감옥에서 구출됩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서 바울은 갇힌 상태로 로마에 머물며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에는 감옥 문을 여시고, 어떤 때에는 감옥 안에서 복음의 문을 여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어떤 상황에서도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6-32)
성전 맡은 자와 부하들은 사도들을 다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자신들을 돌로 칠까 두려워 폭력을 사용하지는 못했습니다. 공회 앞에 선 사도들에게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히 명령했는데도 그들이 예루살렘을 가르침으로 가득하게 했다고 책망했습니다(행 5:28).
이 말은 의도하지 않은 복음의 성취를 보여 줍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활동을 비난했지만, 그들의 증언을 통하여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가득해졌다고 인정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리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목적은 개인적인 복수나 정치적 선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드러내 회개하게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려 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했습니다(행 5:29).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했던 고백이 여기서 더욱 분명하게 반복됩니다. 인간의 권위는 존중해야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권위 위에 하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조건적인 반항을 신앙적 용기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통치자와 사회의 정당한 질서를 존중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간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거스르고 복음 증언을 금지할 때에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불복종은 개인의 감정이나 이익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그 결과로 오는 고난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데 머물지 않고 다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나무에 달았다”는 표현은 저주받은 자가 나무에 달린다는 율법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신 21:22-23).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오른손으로 높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임금”은 백성을 이끄는 통치자이며, “구주”는 자기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개인적인 위안을 주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시며 죄인을 구원하는 구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신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행 5:31).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자신들을 정죄하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도들은 그들에게도 회개와 용서의 길이 열려 있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죄를 폭로하지만 죄인을 절망에 버려두지 않습니다.
회개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갈 능력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마음을 깨우시고 죄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회개를 주신다는 사실이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부르심을 거부하지 말고 실제로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이 일의 증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시라고 말합니다(행 5:32). 여기서 순종은 인간의 행위로 성령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의 부르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주로 따르는 순종을 가리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며 성도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십니다.
가말리엘의 신중한 조언(행 5:33-40)
공회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회개의 복음을 들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졌습니다. 동일한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죄와 권위를 위협하는 불편한 말씀이 됩니다.
그때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인이 공회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그는 율법 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훗날 바울도 자신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다고 말합니다(행 22:3).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내게 한 뒤 공회 사람들에게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드다와 갈릴리의 유다를 예로 들었습니다. 드다는 자신을 대단한 인물로 내세웠고 약 사백 명이 그를 따랐지만 그가 죽은 뒤 추종자들이 흩어졌습니다. 갈릴리의 유다도 호적할 때 사람들을 이끌었지만 죽은 뒤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졌습니다(행 5:36-37). 가말리엘은 인간에게서 시작된 운동이라면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내버려 두라고 권했습니다. 그들의 계획과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무너질 것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공회가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행 5:38-39).
가말리엘의 말은 지혜롭고 신중했지만,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태도는 복음에 대한 적극적인 믿음보다 성급한 처벌을 피하려는 신중한 유보에 가깝습니다. 진리를 무조건 박해하는 것보다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 낫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결국 믿거나 거부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일은 성공하고, 사람에게서 나온 일은 언제나 곧 실패한다”는 식의 단순한 성공 공식으로 가말리엘의 말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잘못된 사상이나 운동이 오랫동안 번성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교회가 외형적으로 작고 고난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는 규모나 지속 기간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말리엘의 신중한 조언을 사용하여 사도들의 생명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뿐 아니라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의 판단과 사회적 위치도 섭리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공회는 그의 말을 받아들여 사도들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한 뒤 놓아주었습니다. 가말리엘의 조언이 사도들의 고통을 완전히 없앤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부당하게 매를 맞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셨다는 말은 언제나 상처와 고난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이 복음 증언을 계속할 수 있도록 생명을 지키셨지만, 그들은 그 이름을 위한 고난을 몸으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행 5:41-42)
사도들은 공회 앞을 떠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김받은 것을 기뻐했습니다. 매를 맞았기 때문에 몸은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들의 감정을 상상하여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고난을 수치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표지로 이해하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통 자체를 즐긴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일부러 찾아다니거나 자신을 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사도들이 기뻐한 이유는 그들의 고난이 범죄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한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자로 말미암아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며 욕할 때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6:22-23). 이제 사도들은 그 말씀을 실제 삶으로 경험합니다. 과거에는 예수님이 체포되자 도망쳤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매를 맞고도 복음 증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두려움을 담대함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가르치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행 5:42). 공회의 금지 명령은 실패했습니다. 사도들의 몸에는 매 맞은 흔적이 남았지만 그들의 입술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이라는 공적인 장소와 집이라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복음 증언은 특정한 예배 시간과 장소에만 제한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쳤고, 가정에서도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나누었습니다. 교회는 모일 때 말씀을 배우고, 흩어질 때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전한 내용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이나 종교적 만족을 얻는 기술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이며 임금과 구주라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교회
사도행전 5장은 교회가 두 방향에서 공격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 안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위선과 거짓이 공동체의 거룩함을 무너뜨리려 했고, 교회 밖에서는 종교 권력이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예수님의 이름을 금했습니다.
사탄은 박해만으로 교회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칭찬받고 싶은 마음, 과장된 헌신, 감추어진 탐욕과 거짓을 이용하여 교회를 안에서부터 부패시킵니다. 외부의 박해를 잘 견디는 교회도 내부의 위선 때문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담대함과 함께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헌신하지 않은 데 있지 않았습니다. 헌신한 것보다 더 헌신적인 사람으로 보이려 한 데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 섬기기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섭섭해하고, 드러나지 않는 봉사를 가치 없다고 생각하며, 실제 믿음보다 더 경건한 모습으로 자신을 꾸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인 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면을 벗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고백하고, 욕심이 있으면 욕심을 인정하며, 죄를 지었으면 숨기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보다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향하여 담대해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가두고 위협하며 매질했지만 복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다시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자리로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려움이 없을 때만 유지되는 신념이어서는 안 됩니다. 손해와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정직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때, 관계 속에서 진리를 말해야 할 때, 사회적 분위기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기게 할 때 사람의 인정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독선적으로 행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개인적인 고집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명하신 복음 증언에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선택도 감정이나 이익이 아니라 성경의 분명한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매를 맞고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은 고난을 피하기 위해 포기할 수 있는 종교적 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은 죄 사함과 생명을 주는 유일한 구원의 이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는 교회가 성장하면서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빠진다고 불평합니다. 교회는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위선을 넘어, 성장 속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행정적 문제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교회가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지혜롭게 일꾼을 세워 말씀과 구제의 사명을 함께 감당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십시오. 사람의 칭찬을 얻기 위해 경건을 연출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마음 깊은 곳까지 주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외부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복음을 침묵하지 마십시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하십시오.
교회는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거룩한 공동체이며, 위협 앞에서도 복음을 멈추지 않는 증인 공동체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진실하게 하시고 우리의 입술을 담대하게 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전에서든 집에서든, 평안할 때든 고난받을 때든,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임금과 구주이심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을 그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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