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장 강해 예수의 이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 본문: 사도행전 4장 전체
  • 핵심 구절: 사도행전 4장 12절

사도행전 3장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회개와 죄 사함, 장차 이루어질 만물의 회복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자 곧바로 저항도 시작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은 교회가 처음으로 조직적인 박해를 경험하는 장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병자를 고쳐 주었다는 이유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다는 이유로 붙잡혔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위협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석방된 사도들이 교회로 돌아오자 성도들은 박해를 피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다시 충만하게 하셨고, 공동체는 한마음과 한뜻으로 복음과 삶을 나누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의 중심에는 두 이름이 대립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금하려는 세상의 권세와 그 이름을 담대히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복음이 세상의 질서와 충돌할 때 우리는 누구에게 순종할 것입니까? 세상의 인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침묵할 것입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담대히 증언할 것입니까? 본문의 사건과 인명 및 구절의 흐름은 대한성서공회 개역개정 사도행전 4장을 기준으로 합니다.

사도들은 갇혔지만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행 4:1-4)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 구역의 질서와 경비를 책임지는 지도자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제사장 계층과 밀접하게 연결된 종교적·정치적 집단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눅 20:27). 그러므로 사도들이 예수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내용은 단순히 예수님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과거의 사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백성도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을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이 마지막 권세가 아니라는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메시아와 주로 인정하셨다는 증거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불쾌감에는 교리적인 이유뿐 아니라 권위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정식으로 지도자의 승인을 받지 않은 갈릴리 출신 사람들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은 얼마 전 종교 지도자들이 배척하고 죽음에 넘긴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증언이 참이라면, 예수님을 정죄했던 지도자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도 드러나게 됩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기 때문에 두 사도는 이튿날까지 갇혔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이 처음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담대히 증언하기 때문에 고난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갇혀 있는 동안에도 말씀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전한 말씀을 들은 사람 가운데 믿는 사람이 많아졌고 남자의 수가 약 오천 명에 이르렀습니다(행 4:4). 일반적으로 이는 남자 신자의 전체 수가 약 오천 명이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다면 실제 공동체의 규모는 더 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혔지만 말씀은 갇히지 않았습니다. 복음 전도자가 침묵을 강요받아도 그가 이미 전한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역사합니다. 세상의 권력은 사람의 몸을 붙잡을 수 있지만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복음의 능력까지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어려움을 만났다고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 문이 닫힌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일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복음의 열매는 사역자의 안전과 형편에 달려 있지 않고 말씀을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누구의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행하였느냐(행 4:5-10)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요한과 알렉산더 및 대제사장의 문중도 참여했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예수님의 재판 과정에도 등장한 대제사장 가문의 중심인물들이었습니다(눅 3:2; 요 18:13-24). 예수님을 심문했던 종교 권력이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운데 세우고 어떤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사람들이 주목했던 것도 치유의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제 공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수하게 진실을 알고 싶어서 묻기보다 사도들의 권위와 사역을 통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도들이 무엇을 행할 때마다 그 근원은 사도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교회의 참된 권위도 인간의 지위나 조직의 규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통하여 맡기신 권위에서 나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할까 두려워했던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님을 죽음에 넘긴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의 변화는 타고난 용기나 훈련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회당과 관리와 권력자 앞에 끌려갈 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마땅히 할 말을 가르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눅 12:11-12). 사도행전 4장에서 그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고난을 반드시 피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할 말을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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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자신들이 심문받는 이유를 되짚어 말합니다. 병든 사람에게 행한 착한 일과 그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에 관해 심문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해친 일도 아니고 성전의 질서를 파괴한 일도 아닙니다. 평생 걷지 못하던 사람이 온전하게 된 선한 일 때문에 심문받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심문이 얼마나 역설적인지를 드러냅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어 그들 앞에 서 있다고 선언합니다. 지도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행 4:10). 베드로는 사람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함께 선포합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인간의 판결은 죽음이었지만 하나님의 판결은 부활과 영광이었습니다.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다(행 4:11-12)

베드로는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합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118편은 고난 가운데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거부한 지도자들에게 이 말씀을 적용하셨습니다(눅 20:17).

건축자는 어떤 돌이 건물에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신앙과 성전을 세우는 건축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집에 필요하지 않은 돌로 판단하여 밖으로 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버린 예수님을 새로운 구원 공동체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머릿돌은 건물의 방향과 안정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집니다. 인간 지도자의 재능이나 전통, 재정과 건물, 사회적 명성이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중심에서 밀어내면 외형은 남아 있어도 하나님의 집으로서 방향과 정체성을 잃게 됩니다.

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고, 세상이 높이는 것을 하나님께서 낮추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가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세상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실패자로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구원이 다른 사람에게는 없다고 선포합니다. 천하 사람 가운데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이 말씀은 기독교인의 우월감을 정당화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교회가 다른 사람보다 본래 더 의롭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죄와 죽음 아래 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고백은 교회가 만들어 낸 배타적인 구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하셨는가에 근거합니다. 다른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로 성육신하지 않았고,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으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구원은 그분에게만 있습니다.

이 고백은 교회를 교만하게 하기보다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고백은 교회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구원이 오직 예수님에게 있다면, 교회는 그 이름을 숨길 수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줄을 알다(행 4:13-17)

공회의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이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글을 읽지 못하는 완전한 문맹이었다는 뜻이라기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인정하는 정규 랍비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들은 공인된 율법 교사나 전문 서기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인용하고 논리적으로 복음을 설명하며 지도자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말했습니다. 공회는 그 담대함의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행 4:13).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자격은 세상적인 학력이나 지위보다 예수님과 함께한 흔적입니다. 물론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필요한 훈련을 받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본문은 무지와 준비 부족을 미덕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훈련만으로는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며, 성령의 능력을 입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무엇을 발견합니까? 우리의 지식과 능력만 바라봅니까,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라는 흔적을 발견합니까?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은 말만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바라보는 눈, 돈과 권력을 사용하는 방식, 고난 속에서 선택하는 길이 달라집니다.

지도자들은 병 나은 사람이 사도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반박할 말이 없었습니다. 치유받은 사람의 존재가 사도들의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말로만 선포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한 사람의 삶은 세상이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공회는 사도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서로 의논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이 이 분명한 표적을 알고 있으므로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표적을 보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표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이 더 널리 퍼지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인간의 불신은 증거가 부족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증거를 보아도 자신의 권위와 기득권을 내려놓고 싶지 않으면 진리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지식이 많다고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행 4:18-22)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행동 전체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금했습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치유된 사실보다 그 치유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두려워했습니다.

세상은 때때로 교회가 봉사하고 구제하며 사회에 도움을 주는 일은 환영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라고 선포하는 것은 불편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교회의 선행과 복음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이웃을 섬겨야 하지만, 그 사랑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숨겨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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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판단해 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행 4:19-20). 사도들은 정치적 반항심이나 개인적인 자존심 때문에 명령을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인간의 명령이 직접 충돌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정당한 질서를 존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질서와 반항을 신앙의 용기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권력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복음 증언을 금하거나 죄를 행하도록 요구할 때에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기독교적 순종은 맹목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모든 권위 위에 하나님의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기독교적 저항은 폭력이나 증오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지도자들을 모욕하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정중하지만 분명하게 자신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했습니다. 증인은 자신의 상상이나 추측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사도들이 전한 증언과 그것이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공회는 백성 때문에 사도들을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한 뒤 놓아주었습니다. 치유받은 사람은 마흔 살이 넘었고, 모든 사람이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습니다(행 4:21-22).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무죄를 믿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풀어 주었습니다.

사람의 여론을 두려워하는 권력은 진리를 따르기보다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생각했습니다. 신앙의 담대함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크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른 두려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위협 속에서 담대함을 구한 교회(행 4:23-31)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들에게 돌아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한 말을 전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고난받은 사도들을 개인적으로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위험과 위협을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한 지체가 고난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아파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은 소식을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세상을 만드신 주권자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십니다(행 4:24). 그들은 위협의 크기부터 묵상하지 않고 하나님의 크심을 먼저 고백했습니다.

기도는 상황을 부정하는 자기암시가 아닙니다. 현실의 위협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문제만 바라보면 두려움이 커지지만,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문제를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시편 2편 1-2절을 인용했습니다. 이방 나라들과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고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이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대적한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는 자신들이 겪는 박해를 우연한 정치적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대적하는 세상의 오래된 반역 안에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시편 2편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대적한 사건에서 성취되었다고 고백합니다(행 4:27). 여기에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헤롯의 정치 권력, 로마 총독 빌라도와 이방인이 함께 언급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특정 민족 전체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종교와 정치,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죄 된 인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건입니다.

동시에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과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행 4:28). 인간은 악한 동기로 예수님을 죽음에 넘겼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통하여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 않고,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지도 못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신비롭게 함께 드러난 사건입니다.

이 확신은 교회가 박해를 해석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박해는 고통스럽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시편 2편에서 하나님은 세상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시온에 자신의 왕을 세우시고 땅끝을 그의 유업으로 주십니다(시 2:6-8).

초대교회는 위협을 없애 달라는 요청보다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가 치유되고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행 4:29-30). 그들은 안전보다 사명을 먼저 구했습니다.

이 기도를 모든 시대의 교회에 동일한 형태의 기적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약속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표적은 특별히 사도들의 부활 증언을 확증하는 구속사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교회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상처받은 사람을 회복하시며, 복음의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모인 곳이 진동했고, 그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습니다(행 4:31). 이들은 이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령 충만은 성령이 전혀 없던 사람에게 처음 임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위협과 사명을 감당하도록 성령께서 다시 능력으로 붙드셨다는 의미입니다.

성령 충만은 한 번의 과거 체험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는 계속해서 성령의 다스리심과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의 결과는 이번에도 분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과시하거나 감정적인 만족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한마음과 한뜻으로 은혜를 나누다(행 4:32-37)

사도행전 4장은 박해에 맞선 담대한 증언에서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믿는 무리는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행 4:32).

성령 충만은 공회 앞에서 말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를 이웃과 나누는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어려운 성도의 필요를 외면한다면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사람의 말뿐 아니라 소유와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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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을 모든 개인 재산을 강제로 폐지한 제도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도 그의 소유였고 판 뒤에도 그가 결정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행 5:4). 초대교회의 나눔은 국가나 지도자가 강제로 재산을 빼앗아 분배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내어놓은 것입니다.

핵심은 소유권의 법적 폐지보다 소유를 바라보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보았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욕망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공동체의 필요를 위하여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청지기적 소유입니다.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고, 무리에게 큰 은혜가 임했습니다(행 4:33). 큰 권능과 큰 은혜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권능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는 은혜로 나타났습니다. 복음의 교리가 사랑의 실천을 낳고, 사랑의 실천이 복음의 진실성을 드러냈습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은 모든 사람의 재산이 정확히 같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그것을 팔고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으며,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행 4:34-35). 초대교회가 목표로 삼은 것은 획일적인 평등보다 실제적인 필요의 돌봄이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동정의 대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형제와 자매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 지체의 굶주림과 고통이 공동체 전체의 아픔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개인의 내면적 평안에만 머물고 이웃의 필요를 보지 못한다면 사도행전의 공동체성과 멀어집니다.

누가는 이러한 나눔의 구체적인 사례로 바나바를 소개합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고,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에게 바나바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행 4:36-37).

바나바는 이후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회심한 사울을 두려워할 때 그를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소개하고(행 9:26-27), 안디옥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며 성도들을 격려합니다(행 11:22-24). 그는 사울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되며, 실패한 마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행 13:1-3; 15:36-39).

사도행전 4장에서 바나바의 첫 등장은 소유를 내어놓는 장면입니다. 위로는 따뜻한 말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구체적인 희생입니다. 바나바는 말과 물질과 관계를 통해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도행전 5장에는 바나바와 대조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등장합니다. 그들도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오지만, 사람들에게 경건하게 보이려는 욕망과 거짓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같은 행동처럼 보여도 마음의 동기와 진실성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성령의 공동체는 외형적인 헌신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을 요구합니다.

침묵할 수 없는 교회로 살아가라

사도행전 4장은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박해와 저항이 뒤따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치유된 것은 분명한 선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그 일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하자 종교 권력이 그들을 붙잡았습니다.

세상은 교회의 선행을 어느 정도 환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고백은 불편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지운 채 선행만 남길 수 없습니다. 교회의 사랑과 봉사, 구제와 치유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로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믿음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도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러나 겸손과 침묵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존중하면서도 복음의 진리는 분명하게 전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은 타고난 용기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참된 담대함은 자신의 확신을 크게 외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며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교회가 위협을 만났을 때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두려움에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문제의 크기를 반복해서 말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크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편안함보다 담대함을, 위험의 제거보다 사명의 성취를 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안전과 형통만을 위한 기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반대와 오해 속에서도 복음을 진실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지키고,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말로만 담대한 교회가 아닙니다. 한마음과 한뜻으로 서로의 필요를 돌보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입으로 증언하면서 자신의 소유를 우상처럼 붙들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입술을 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우리의 손을 열어 이웃과 나누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4장의 교회는 박해를 받았지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위협을 받았지만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었지만 가난해진 공동체가 아니라 큰 은혜를 누리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정치적 영향력이나 재정적 풍요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충만함에서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의 위협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인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감추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다른 이름이 없음을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고백하십시오. 기도할 때 어려움만 없애 달라고 구하지 말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담대함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소유와 시간과 은사를 열어 어려운 지체들의 필요를 돌보십시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거절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교회의 머릿돌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이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이름으로 살아가고, 그 이름을 전하며, 그 이름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초대교회의 믿음이며,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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