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강해 은과 금 나 없어도

은과 금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본문: 사도행전 3장 전체
  • 핵심 구절: 사도행전 3장 16절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시고 예루살렘에 첫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와 떡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3장은 성령으로 태어난 교회가 실제 세상의 고통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순절의 불은 다락방 안에 머물지 않았고, 성령의 능력은 특별한 종교 체험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한 사람에게로 이끄셨습니다.

본문에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전 문까지 왔지만, 자신이 기대한 것은 그날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얼마의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큰 은혜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고, 이 기적을 계기로 베드로는 솔로몬의 행각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회개와 죄 사함, 만물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3장의 중심은 기적을 행한 베드로가 아닙니다. 치유받은 사람의 놀라운 변화만도 아닙니다. 생명의 주이시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중심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습니까? 고통받는 사람에게 일시적인 도움만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말과 사역을 통해 사람들이 인간의 능력을 바라봅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까?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는 두 사도(행 3:1)

베드로와 요한은 제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제구 시는 오늘날의 시간으로 대략 오후 세 시에 해당합니다. 초대교회가 탄생했다고 해서 제자들이 곧바로 유대인의 모든 생활 방식과 단절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을 성취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는 구약과 단절된 새로운 종교로 갑자기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갑니다. 베드로는 뒤이어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행 3:13). 복음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에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경험했지만 기도 생활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은 기도를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기도하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을 자기 확신으로 가득 채우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성전으로 올라갔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 당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제자들 사이에서 경쟁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함께 복음을 증언하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특별한 위기가 찾아왔을 때만 사용하는 비상수단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기도는 정해진 삶의 리듬이었습니다. 바로 그 기도의 길에서 그들은 고통받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참된 기도는 세상의 아픔에서 우리를 도피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게 하고, 동시에 고통받는 이웃을 향해 눈을 열게 합니다.

미문 앞에 머물러 있던 한 사람(행 3:2-5)

성전 문 앞에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 따르면 그는 마흔 살이 넘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자신의 힘으로 걷지 못했고, 날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 성전 미문에 놓였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미문이 성전의 어느 문이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견해가 있지만, 누가는 그 문의 정확한 위치보다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심을 둡니다.

성전 문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구걸하기에 적절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는 날마다 그곳에 앉아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얼마의 돈을 주었을 수 있지만, 그를 근본적으로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교회는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행 2:44-45).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을 주는 일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이 필요하고, 치료가 필요한 사람에게 의료적 도움이 필요하며,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물질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베드로의 행동을 물질적 구제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필요는 물질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얼마의 돈을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몸과 삶 전체를 새롭게 하려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한다면 눈앞의 필요를 돌보는 동시에 그 사람에게 가장 깊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자 두 사도는 그를 주목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자신들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요구가 아닙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서로를 인격적으로 마주 보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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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두 사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선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동전을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삶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당장의 문제를 조금 덜어 달라고 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향을 새롭게 하시려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다(행 3:6-10)

베드로는 자신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합니다(행 3:6). 이 말씀을 교회가 가난해야 한다는 뜻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재정 부족을 미덕으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손에 돈은 없지만 돈보다 크고 근본적인 선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발음이나 호칭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인격과 권위와 현존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는 것은 특정한 문장을 주문처럼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에게 그 사람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치유의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나 사역자가 자신을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인 것처럼 높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듭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명령만 던지고 거리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치유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지만, 그 은혜를 전달하는 자리에는 한 사람을 향해 내민 사도의 손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동시에 넘어져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사랑의 접촉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 순간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습니다. 누가는 치유가 점진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즉시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일어나 서고, 걷고, 뛰면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행 3:7-8).

그가 걷고 뛰는 모습은 장차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때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뛸 것이라고 말한 이사야의 약속을 연상시킵니다(사 35:6). 누가는 이사야서를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 치유가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회복을 보여 준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영혼이라는 한 부분만 구원하는 추상적 메시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무너진 인간과 창조 세계 전체를 회복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치유받은 사람은 베드로를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참된 은혜의 결과는 인간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감사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도움을 받았을 때 우리에게 매이게 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참된 사역은 사람을 사역자에게 붙잡아 두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

모든 백성은 그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의 변화는 숨길 수 없었습니다. 늘 다른 사람에게 들려 오던 사람이 이제 자신의 발로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구걸하던 입술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정체성을 새롭게 합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는 오랫동안 무력한 구걸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1-16)

치유받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있을 때 백성들이 크게 놀라 솔로몬의 행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솔로몬의 행각은 성전 구역에 있던 주랑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곳에서 말씀하셨고(요 10:23), 이후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로도 나타납니다(행 5:12).

베드로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주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 기적을 행한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하기 쉽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시선을 즉시 거부했습니다. 자신들의 개인적인 권능이나 경건으로 그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행 3:12).

베드로는 오순절에 수많은 사람 앞에서 설교했고, 이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키는 기적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들어 두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을 유명하게 만드는 데 목적을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유혹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브랜드로 바꾸는 것입니다. 설교자, 치유자, 지도자, 특정한 교회나 단체가 그리스도보다 더 크게 보이기 시작하면 복음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아무리 귀한 은사를 받았더라도 우리는 은혜의 통로일 뿐 은혜의 근원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 기적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 사건으로 설명합니다(행 3:13). “종”으로 번역된 말은 문맥에 따라 아들이나 종을 뜻할 수 있는 파이스(παῖς)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이라는 의미가 두드러지며, 여호와의 종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사 42:1; 52:13).

베드로는 예수님을 “거룩하고 의로운 이”이며 “생명의 주”라고 선포합니다(행 3:14-15). “생명의 주”에 사용된 아르케고스(ἀρχηγός)는 어떤 일을 시작하고 이끄는 창시자, 선구자, 근원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생명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시며 사람을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의 주를 죽이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가진 비극적인 역설입니다. 인간은 생명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생명의 주를 거부합니다.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죄의 종으로 만드는 것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분보다 자신들의 욕망에 익숙한 길을 선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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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죽인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사도들은 그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치유의 능력은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이 사람들이 보고 알고 있던 그 사람을 성하게 했습니다(행 3:16).

믿음은 인간 안에서 만들어 낸 강한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의 능력은 믿는 사람의 심리적 강도에 있지 않고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지 않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그 사람에게 완전한 치유를 주었다고 증언합니다. 신앙의 중심은 “내가 얼마나 강하게 믿는가”보다 “내가 누구를 믿는가”에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7-21)

베드로는 청중을 향하여 그들이 알지 못해서 그렇게 행동했고, 지도자들도 그러했다고 말합니다(행 3:17). 이것은 그들의 책임을 완전히 없애려는 말이 아닙니다. 앞에서 베드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넘겨주고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무지는 죄의 책임을 지워 주지 않지만,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의 문이 아직 열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죄를 지적하는 엄중함과 회복을 초청하는 은혜가 함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기 위해 죄를 폭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 죄를 밝힙니다. 복음적인 설교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죄인을 소망 없이 버리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미리 알리신 말씀의 성취였습니다(행 3:18).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획 밖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폭력을 승인하지 않으시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과 구원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와 관련된 말로, 단순히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죄와 불신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청중에게 회개는 자신들이 거부했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와 생명의 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회개하라”는 요청과 “돌이키라”는 요청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속의 슬픔으로 끝나지 않고 삶의 방향 전환으로 나타납니다. 죄를 미워한다고 말하면서 계속 죄의 길을 선택한다면 온전한 회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회개는 우리의 생각, 관계, 언어, 돈의 사용, 권력을 대하는 태도, 은밀한 습관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은 죄 없이 함을 받습니다. 이것은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로 죄를 지우시고 용서하신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죄를 감추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죄를 그리스도 앞에 가지고 나아가 용서와 새 생명을 받게 합니다.

베드로는 회개와 죄 사함에 이어 주 앞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행 3:19). 여기서 “새롭게 되는 날”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오는 쉼과 회복의 때를 가리킵니다. 이는 회개한 사람이 현재 경험하는 영적 새로움과 연결되면서,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종말론적 회복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님을 보내실 것이며, 하늘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그분을 받아 두어야 합니다(행 3:20-21). 이는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만물을 회복하신다”는 말씀을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 없이도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보편구원론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어지는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가 백성 가운데서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행 3:23). 만물의 회복은 죄와 죽음으로 무너진 창조 세계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완전하게 세우시는 것을 뜻합니다.

현재의 치유는 그 완전한 회복을 미리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었지만, 그날 세상의 모든 질병과 장애와 죽음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 기적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현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치유와 돌봄을 실천하면서도, 모든 눈물과 죽음이 완전히 사라질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증언한 그리스도(행 3:22-24)

베드로는 모세가 말한 자신과 같은 선지자에 관한 약속을 인용합니다(신 18:15-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한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므로 백성은 그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약속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연결되지만 모세보다 크신 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냈지만,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종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나타내신 아들이십니다. 모세를 통하여 옛 언약이 주어졌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종교적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정적인 선지자이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순종하는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그분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멸망할 것이라는 모세의 경고도 함께 전합니다(행 3:23).

복음은 위로와 초청이지만 동시에 엄중한 요구입니다. 예수님을 좋은 교사나 여러 종교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으며 순종해야 합니다. 복음의 은혜가 크기 때문에 그 은혜를 거부하는 일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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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사무엘 때부터 이어진 모든 선지자도 이 시대를 가리켜 말했다고 선언합니다(행 3:24). 이것은 모든 선지서의 모든 구절이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이 바라보는 궁극적인 방향, 곧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 의로운 왕과 새 언약, 성령의 부으심과 만물의 회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그리스도와 분리하여 읽으면 도덕적 교훈과 종교적 정보만 남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약속이 향하는 중심이십니다. 사도들은 구약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구약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과 만민의 복(행 3:25-26)

베드로의 청중은 선지자들의 자손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로 말미암아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3; 22:18). 베드로는 이 언약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만 복을 누리고 다른 민족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려는 선교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 만민에게 이르는 길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 예수를 일으켜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셨습니다(행 3:26). 복음이 먼저 이스라엘에게 선포된 것은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신과 일부 지도자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약을 가볍게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회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먼저”라는 말은 “오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처음부터 모든 족속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지만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행 1:8). 사도행전 3장의 마지막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후 사도행전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을 준비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어 주시는 복이 무엇인지도 중요합니다. 그 복은 단순히 건강과 재물이 많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각 사람을 그 악함에서 돌이키게 하심으로 복을 주신다고 말합니다(행 3:26).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언약의 복입니다.

우리는 복을 환경이 좋아지고 원하는 것을 얻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를 그대로 붙들고 있으면서 물질만 많아지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복이 아닙니다. 가장 큰 복은 그리스도를 알고, 죄 사함을 받으며, 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일어나 걸으며 하나님을 찬송하라

사도행전 3장은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한 사람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이동할 수 없었고, 날마다 같은 자리에서 얼마의 돈을 기대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의 삶에 임하자 그는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기적은 그 사람의 몸을 회복시킨 사건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적 자체에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놀라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기회로 바꾸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은 교회가 무엇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교회에는 은과 금도 필요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물질과 제도와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크고 고유한 선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교회가 물질은 풍성하지만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면 세상과 구별되는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종교적 구호나 주문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살아 계시는 생명의 주님의 인격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삶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이 주시는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고통받는 사람을 주목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성전 미문을 지나갔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복음의 눈은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교회가 거대한 계획과 행사에 몰두하면서 문 앞에 앉아 있는 고통받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면 사도행전의 길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우리에게 매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할 때 자신의 능력과 경건을 부인하고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렸습니다. 우리의 설교와 봉사와 목회도 사람들이 우리를 높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의 기적은 놀라운 사건이지만, 베드로의 설교가 요구하는 궁극적인 반응은 놀라움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기적을 보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믿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는 이 복음이 종교 지도자들의 저항을 만나게 됩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 베드로와 요한은 붙잡히고 심문받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막히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가운데 믿는 자가 많아집니다. 미문 앞에서 일어난 한 사람의 치유는 예루살렘을 뒤흔드는 복음 증언으로 이어집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일으키십니다. 절망에 주저앉은 사람을 소망으로 일으키고, 죄에 묶인 사람을 회개로 이끌며,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은과 금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십시오. 그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며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그리고 고통 속에 주저앉아 있는 이들에게 그 생명의 이름을 담대히 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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