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르지 아니하고
본문: 사도행전 26장 전체
핵심 구절: 사도행전 26장 19-20절
사도행전 25장에서 바울은 증거 없는 고발과 베스도의 정치적 계산 앞에서 가이사에게 상소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로 가는 법적 길이 열렸지만, 베스도는 황제에게 보낼 만한 분명한 죄목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침 유대교의 풍속과 쟁점을 잘 알고 있던 아그립바 왕이 버니게와 함께 가이사랴를 방문하자, 베스도는 바울을 그들 앞에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26장은 바울이 자신의 회심을 증언하는 세 번째 기록입니다. 그러나 앞선 사도행전 9장과 22장의 내용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습니다. 아그립바를 향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과 죽은 자의 부활, 고난받는 그리스도,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비치는 빛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만 주장하지 않고 왕과 총독과 모든 청중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자신을 재판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그리스도께 초청합니다. 세상의 법정에서 바울은 죄수였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활하신 왕의 증인이었습니다. 이 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주신 부르심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복음을 알고 논평하는 데 머물지 않고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고 있습니까?
피고인의 자리를 복음의 강단으로 바꾸다(행 26:1-3)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자신을 위해 말하도록 허락하자 바울은 손을 들어 변론하기 시작했습니다(행 26:1). 전날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크게 위엄을 갖추고 천부장들과 도시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왔습니다. 바울은 그들 앞에 결박된 죄수로 섰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말할 권한을 주었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주님께서 왕과 총독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자신을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해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아그립바가 유대인의 풍속과 여러 문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는 왕에게 자신의 말을 너그럽게 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행 26:2-3).
바울의 말은 더둘로가 벨릭스에게 했던 과장된 아첨과 다릅니다. 더둘로는 재판관의 호의를 얻기 위해 벨릭스의 업적을 지나치게 칭찬했지만, 바울은 아그립바가 실제로 유대인의 풍속과 종교적 쟁점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 언급했습니다. 복음의 증인은 예의를 지켜야 하지만 진실을 왜곡하며 권력자에게 아첨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석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절부터 그는 고발 내용만 반박하지 않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찾아오셨고, 어떤 사명을 주셨는지를 증언합니다. 법적 변론이 복음 전도로 바뀝니다.
우리는 조건이 좋아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강단이 아니라 법정에서, 자유인이 아니라 죄수의 신분으로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당과 선교 집회만 복음의 장소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직장과 병실, 학교와 법정, 실패와 기다림의 자리도 복음의 강단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가 그 자리에서 누구를 드러내는가입니다. 억울한 상황에 놓였을 때 자신의 결백만 주장하다 끝날 수도 있고, 진실을 밝히면서도 그 기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방어했지만 자기 자신을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전했습니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과 부활의 소망(행 26:4-8)
바울은 자신의 젊은 시절 생활을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증언할 의향만 있다면 자신이 유대교의 가장 엄격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으로 살았음을 인정할 것이라고 했습니다(행 26:4-5). 바울은 조상의 신앙을 무지하게 배척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배우고 지키며 부활을 믿었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재판받는 이유를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라고 설명했습니다(행 26:6). 바울에게 복음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폐기한 새로운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 다윗에게 약속하신 왕, 선지자들이 예언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약속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섬기며 얻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고 말했습니다(행 26:7).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정치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 존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열두 지파”는 하나님 언약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소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소망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약속의 중심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 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와 청중에게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행 26:8). 부활은 인간의 경험과 자연의 가능성만으로 판단하면 믿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한다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은 막연한 낙관이나 죽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실제로 일으키셨다는 역사적·구속사적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을 보증합니다.
교회는 부활을 부활절의 감동적인 주제로만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은 오늘의 선택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에 성도는 생존을 위해 진리를 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의를 세우실 것이기에 억울함 속에서도 악으로 보복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몸과 삶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육체와 세상을 함부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인간의 가능성만 계산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절망적인 현실을 낙관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끝난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다(행 26:9-12)
바울은 자신도 한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는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고 고백했습니다(행 26:9). 그는 예수님을 반대한 이유가 종교에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지식과 자기 확신이 결합하면 종교적 열심은 매우 파괴적인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들에게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 찬성 투표를 했으며, 여러 회당에서 그들을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분노가 극에 달하여 외국 도시까지 찾아가 박해했습니다(행 26:10-11).
“찬성 투표를 하였다”는 표현을 근거로 바울이 반드시 공회의 정식 의원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그의 정확한 직책보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참여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울은 과거의 책임을 축소하지 않았습니다.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행 26:10). 과거에는 제거해야 할 이단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인정합니다. 회심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눈도 바꿉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자신이 멸시하고 공격했던 사람에게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지체를 보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도록 압박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애려고 했던 바로 그 이름이 다메섹 길에서 바울을 불러 세웠습니다. 인간은 예수의 이름을 지우려 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박해자의 삶 전체를 바꾸셨습니다.
바울의 간증은 과거의 폭력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악인이었는지를 자랑하며 특별한 간증자로 보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죄보다 더 큰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냈습니다. 기독교의 간증은 죄의 자극적인 세부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죄인을 찾아오신 구주를 높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모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교회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사실 확인 없이 사람을 배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은 진리와 사랑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말씀에 일치하는지 계속 점검해야 합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던 박해자를 종과 증인으로 세우다(행 26:12-18)
바울은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정오가 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과 동행자들을 둘러 비추었고, 그들은 모두 땅에 엎드러졌습니다(행 26:12-14). 바울의 회심은 마음속에서 일어난 막연한 종교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동행자들도 빛 앞에 엎드린 실제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어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말씀이 주어졌습니다(행 26:14). 가시채는 짐승이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찌르는 도구였습니다. 짐승이 그것을 뒷발로 차면 가시채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만 더 다치게 됩니다.
이 표현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는 땅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의 완고함이 하나님의 주권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주님 누구시니이까”라고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대답이 들렸습니다(행 26:15).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지만 예수님은 그 일을 자신에 대한 박해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고난받는 교회와 자신을 깊이 연합시키십니다.
주님은 바울을 심판하여 제거하는 대신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행 26:16). 은혜는 죄인을 땅에 엎드러뜨리지만 거기에 버려 두지 않습니다. 죄를 깨닫게 한 뒤 일으켜 새로운 삶과 사명을 주십니다. 바울은 자기 힘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목적은 그를 “종과 증인”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종(휘페레테스 ὑπηρέτης)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꾼을 뜻합니다. 증인(마르튀스 μάρτυς)은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을 공적으로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독창적인 종교 사상을 만들어 내는 창시자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전하는 종이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구원하여 다시 그들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행 26:17). 여기의 구원은 바울이 어떤 고난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결국 결박된 채 왕 앞에 섰습니다. 이 약속은 주님께서 맡기신 증언을 이루도록 그를 보호하고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됩니다(행 26:18). 이 표현은 이사야가 예언한 여호와의 종의 사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을 열방의 빛으로 세워 눈먼 자의 눈을 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사 42:6-7; 사 49:6).
바울이 사람의 눈을 자기 능력으로 여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의 눈을 여시고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그 구원을 선포하는 도구입니다. 복음 전도는 사람의 취향을 바꾸거나 종교적 교양을 더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옮겨지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죄 사함과 기업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인간의 공로나 민족적 자격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기업의 소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방의 신자들에게까지 확장됩니다.
성령께서 눈을 열어 주시면 우리는 죄를 자유라고 부르던 삶에서 돌이킵니다. 돈과 성공, 쾌락과 권력을 주인으로 섬기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복음은 현실적인 문제를 잠시 잊게 하는 위로가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가 바뀌는 해방의 소식입니다.
하늘의 비전에 순종하여 회개를 전하다(행 26:19-23)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였다”고 말했습니다(행 26:19). 그의 사역은 개인적 야망이나 새로운 종교 운동을 만들려는 계획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하늘의 비전에 순종했다는 말은 바울이 한 번의 신비한 체험만 붙들고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비전의 내용은 구체적인 복음 선포와 지속적인 사역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했습니다(행 26:20).
회개(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는 단지 죄 때문에 슬퍼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죄와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울은 회개에 합당한 일을 요구했습니다. 선한 행위가 구원의 값을 지불한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회개에는 변화된 삶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은 홀로 머물지 않습니다. 거짓을 버리고 정직을 선택하며, 탐욕에서 돌이켜 나누고, 미움을 내려놓고 용서하며, 불의하게 얻은 것을 바로잡는 열매를 맺습니다. 입으로 회개했다고 말하면서 삶의 방향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믿음을 살펴야 합니다.
바울이 붙잡힌 이유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이 복음을 이방인에게까지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자신을 붙잡아 죽이려 했다고 말했습니다(행 26:21). 그러나 특정 민족 전체를 복음의 적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 자신과 초기 교회의 수많은 성도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이방인의 구원을 거부하며 폭력을 사용한 특정 사람들의 행위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증언한다고 고백했습니다(행 26:22). 그는 자신의 담대함과 지혜가 자신을 지켜 주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죽을 위험을 지나 왕과 총독 앞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언제나 고난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여전히 쇠사슬을 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임당하지 않고 증언의 사명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도우심은 감옥 문을 즉시 여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서도 진리를 말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전한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내용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빛을 전하실 것이라는 복음입니다(행 26:22-23).
고난받는 그리스도는 이사야 53장의 여호와의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종에게 많은 사람의 죄악을 담당하게 하시고, 고난 이후에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십니다. 시편 16편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을 노래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약속을 성취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셨다는 것은 이전에 소생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과 복음서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완전히 이기고 부활의 새 시대를 여신 첫 열매이십니다. 그분의 부활은 장차 성도들이 입게 될 영광스러운 부활의 시작이며 보증입니다.
미쳤다는 조롱 앞에서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다(행 26:24-27)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언하자 베스도는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행 26:24). 베스도에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바울의 주장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에 관한 긴 설명도 낯선 종교적 학문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모욕을 받았지만 흥분하거나 베스도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행 26:25). 그는 존중하는 호칭을 사용하면서도 자신의 증언이 진실하다는 점에서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상식과 욕망에 언제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만왕의 왕이며, 죄인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소식은 세상의 지혜에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비이성적인 맹신이 아닙니다.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가 이 일을 알고 있기에 담대히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행 26:26).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 죽음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부활의 복음도 예루살렘에서부터 널리 선포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소수의 비밀 집단만 공유하는 숨겨진 지식이 아닙니다.
바울은 갑자기 변론의 방향을 아그립바 개인에게 돌립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 26:27). 그는 아그립바가 단순히 심문을 관찰하는 사람으로 남게 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를 믿는다면 그 선지자들이 예언한 고난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응답해야 했습니다.
복음은 정보로만 들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이해했다면 그분을 믿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왕의 체면과 지위를 두려워하여 질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결단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아그립바의 양심 앞에 질문을 놓았습니다.
오늘날 설교도 성경 지식을 설명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역사와 원어와 교리를 정확히 가르쳐야 하지만, 결국 청중에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것을 요청해야 합니다. 복음은 연구의 대상인 동시에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적은 말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가(행 26:28-32)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행 26:28). 이 문장의 헬라어 표현은 짧은 시간 또는 적은 말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아그립바의 어조가 진지한 것인지 다소 냉소적인 것인지도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거의 회심 직전이었다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전적으로 조롱했다고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아그립바가 바울의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를 믿느냐는 질문에서 벗어나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의미를 알아들었지만 믿음의 고백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스 Χριστιανός)은 그리스도께 속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이름은 안디옥에서 제자들에게 처음 붙여졌습니다(행 11:26).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 문화에 호감을 갖거나 교회의 도덕을 존중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자신의 삶을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이 적으나 많으나” 아그립바뿐 아니라 그날 자신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다만 자신이 찬 결박은 제외했습니다(행 26:29). 이 말씀에는 바울의 복음 전도자로서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와 베스도에게 자신의 처지를 부러워하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죄 사함과 부활의 소망,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을 그들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쇠사슬 자체를 영웅적으로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되 자신처럼 부당한 결박을 당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재판하는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품지 않았습니다. 베스도는 그를 미쳤다고 조롱했고, 아그립바는 그의 운명에 관해 의견을 제시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복음 전도의 목적은 논쟁에서 승리하여 상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갔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바울이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행 26:30-31). 천부장 루시아와 총독 베스도에 이어 아그립바도 바울의 무죄를 인정했습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행 26:32). 이 말을 근거로 바울의 상소가 실수였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암살될 위험에 놓였고, 베스도는 정치적 호의를 위해 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보내려 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바울이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행 23:11). 바울의 상소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법적 통로가 됩니다.
바울은 법정에서 무죄 판정을 받았지만 즉시 자유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박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왕과 총독, 군 지휘관과 도시의 높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들었습니다. 세상은 바울을 심문했지만 하나님은 그 심문을 복음 전도의 자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행 26:1-32)
사도행전 26장은 바울의 변론이지만 중심 인물은 바울이 아닙니다. 중심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바울의 과거를 심판하고, 그를 땅에 엎드러뜨리며, 다시 일으켜 종과 증인으로 세우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눈을 열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바울의 회심은 단순한 종교 변경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주인이 바뀌고 삶의 방향이 뒤집힌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성도를 결박하던 사람에서 예수님의 권한을 받아 죄인을 자유롭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던 자가 생명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고난받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약속한 그리스도이며, 죽음을 이기고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빛을 비추시는 구주입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옮겨지며, 거룩하게 된 백성 가운데 기업을 얻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자신의 확신과 종교적 열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했던 교만입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사람을 상하게 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원수로 여겼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복음을 이해하면서도 아그립바처럼 분명한 대답을 피했던 태도도 회개해야 합니다.
복음을 거의 받아들이는 것과 복음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스도교에 호감을 갖고 성경을 깊이 이해하며 설교에 감동해도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구원은 “거의”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합당한 열매가 따라야 합니다. 거짓에서 정직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탐욕에서 나눔으로,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 변화가 구원의 공로는 아니지만, 살아 있는 믿음이 맺는 열매입니다. 교회는 입술의 고백만 확인하지 말고 성도들이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늘에서 주신 부르심을 거스르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가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환상을 보거나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체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그를 세우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통해 주어진 복음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시장의 사람과 회당의 청중에게 전했으며 왕과 총독에게도 동일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권력자 앞에서 복음을 부드럽게 변형하거나 죄와 심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그들을 증오하지 않고 자신처럼 구원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은 마침내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오릅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유라굴로라는 광풍과 파선의 위기가 기다립니다. 가이사에게 가리라는 법적 결정과 로마에서 증언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이 있어도 항해는 평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폭풍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폭풍도 그 목적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손에는 쇠사슬이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자유로웠습니다. 아그립바는 왕좌에 앉았지만 복음 앞에서 결단을 피했습니다. 참된 자유는 환경과 지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을 때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늘에서 보이신 복음을 거스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 목적은 우리만 구원받고 평안하게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 빛을 전하고, 죄에 매인 사람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며,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모두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자유로우나 결박되었으나, 우리의 소원은 하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말을 듣고 삶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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