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임하시고 교회가 태어나다
- 본문: 사도행전 2장 전체
- 핵심 구절: 사도행전 2장 36절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에 머물며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아직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조직이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자, 두려움에 머물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담대하게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성령강림은 제자들의 종교적 감정이 고조된 사건이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고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우신 구속사적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장은 성령의 강림, 여러 언어로 나타난 하나님의 큰일, 베드로의 설교, 사람들의 회개와 세례, 초대교회 공동체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성령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이 오늘날 교회에 던지는 질문도 분명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구하면서 정말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는가, 복음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있는가, 성령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다(행 2:1-4)
성령강림은 오순절에 일어났습니다. 오순절은 구약의 칠칠절과 연결되는 절기로, 유월절 이후 곡식의 첫 열매를 드린 날부터 일곱 주를 계산하여 지키는 절기였습니다(레 23:15-21).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수확을 감사하며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신 16:9-12). 그러므로 오순절은 추수와 감사의 의미를 지닌 절기였습니다.
바로 그날 성령께서 임하셨다는 사실에는 깊은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며, 이제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복음의 추수가 시작됩니다. 그날 삼천 명이 말씀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사건은 앞으로 열방 가운데 이루어질 영적 추수의 첫 열매와 같았습니다.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을 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또한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누가는 실제 바람이나 실제 불이라고 말하지 않고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건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람과 불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창조 때 수면 위에 운행하셨고(창 1:2), 생기를 잃은 마른 뼈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겔 37:9-10). 불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냈으며(출 3:2),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냈습니다(출 19:18).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서 중요한 것은 바람과 불이라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성령께서 실제로 제자들에게 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공동체 위에 막연히 머문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 선지자나 왕과 같이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에게 임하는 경우가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소수 지도자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는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며 복음을 증언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성령 충만은 인간의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는 상태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하며,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말과 삶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여러 언어로 선포된 하나님의 큰일(행 2:5-13)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사용된 “언어”는 헬라어 글로사(γλῶσσα)이며,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태어난 지역의 말로 듣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누가는 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소리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들은 사건으로 기록합니다(행 2:6-11).
당시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여러 지역에서 와 있었습니다. 본문은 바대, 메대, 엘람, 메소보다미아에서 시작하여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 로마, 그레데와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열거합니다. 그 가운데는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명단은 당시 알려진 세계의 여러 방향을 포괄하며, 복음이 장차 민족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갈 것을 미리 보여 줍니다.
오순절의 언어 사건은 복음의 보편성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한 민족의 언어만 거룩하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이 태어난 곳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게 하십니다. 복음은 한 문화와 언어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어느 민족도 복음을 독점할 수 없고, 어떤 언어도 복음을 담기에 부적합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바벨탑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창 11:1-9). 바벨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흩어짐을 피하려고 탑을 쌓았습니다. 그 결과 언어가 혼잡해지고 사람들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다양한 언어가 사라져 하나의 언어로 통일된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차이를 억압하여 하나 됨을 이루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가운데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 됨을 이루십니다.
사람들은 놀라며 이 일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보고도 반응은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표적 앞에서 질문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웃습니다. 표적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적은 말씀의 의미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 성경을 풀고 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선포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현상만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체험이 있더라도 그것이 성경의 말씀으로 해석되지 않고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는다면 신앙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요엘의 예언과 말세의 시작(행 2:14-21)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큰 소리로 무리에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당시 시간이 제삼 시, 곧 일반적으로 오전 아홉 시쯤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일어난 사건은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주신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요엘서는 죄로 인한 심판과 황폐함을 선포하면서도, 백성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때 주실 회복을 약속합니다. 그 회복의 절정에 하나님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욜 2:28-32). 베드로는 이 약속이 오순절에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그 후에”라는 표현을 “말세에”라고 풀어 선포합니다. 말세는 단지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의 짧은 기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구원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성령강림은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표지입니다.
이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며, 늙은이들이 꿈을 꾸고, 남종과 여종에게도 성령이 부어집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가 동일한 직분이나 동일한 은사를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별과 나이와 사회적 신분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장애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인간 사회가 세운 우열의 질서를 넘어섭니다.
예언의 핵심도 미래를 점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하는 데 있습니다. 오순절의 제자들이 보여 준 첫 번째 성령 충만의 열매는 자신의 미래를 알아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엘의 예언에는 성령의 부으심과 함께 주님의 크고 영화로운 날에 대한 심판의 이미지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성령의 시대가 은혜만 말하고 심판을 제거한 시대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구원의 문이 열렸지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회개의 때이며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행 2:21). 여기서 “누구든지”는 복음의 넓이를 보여 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는 말씀은 구원의 분명한 길을 보여 줍니다. 민족과 신분에 관계없이 구원의 초청은 열려 있지만, 구원은 막연한 종교심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데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행 2:22-32)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의 현상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나사렛 예수에게로 향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설교의 특징입니다. 성령을 바르게 전하는 설교는 성령 자체의 체험만을 강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선포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으며, 그것으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임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합니다(행 2:22). 사도행전의 표적은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볼거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밝히고 복음의 진실성을 증언하는 표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두 관점에서 함께 설명합니다(행 2:23).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과 아신 바에 따라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죽음에 넘긴 사람들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죄를 선으로 바꾸어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악을 의도했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통하여 구원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줍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특정 민족 전체에 대한 정죄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에는 일부 유대 지도자들과 군중, 로마의 정치 권력과 군인들이 함께 얽혀 있었습니다. 더 깊은 신학적 의미에서 예수님은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죄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죽음이 예수님을 붙잡아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행 2:24). 부활은 사도들이 만들어 낸 위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의로운 메시아로 확증하신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여 부활을 설명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음의 권세에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무덤도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다윗이 궁극적으로 자신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다보았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세계에 버림받지 않으셨고 그의 육신은 썩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이 부활의 증인들입니다(행 2:31-32). 기독교 복음의 중심에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교회는 세상을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령강림은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선물이다(행 2:33-36)
베드로는 부활에서 승천과 성령강림으로 설교를 이어 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으셨고, 아버지께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제자들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들은 오순절의 현상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셨다는 증거였습니다(행 2:33).
여기에서 성령강림과 예수님의 승천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활동하시는 어떤 능력이 아닙니다. 성부께서 약속하셨고, 성자께서 보내셨으며,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증언하십니다. 오순절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교회 가운데 나타난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에게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노래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합니다. 십자가에서 낮아지신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은 공간적인 방향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에 참여하는 영광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의 중심은 인간이 특별한 체험을 얻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여 지금도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온 집이 이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행 2:3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가 승천 후에 비로소 신적 존재가 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사람들이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메시아적 왕과 주로 공개적으로 확증하고 높이셨습니다.
교회의 중심 고백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특정한 은사나 사람을 높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구한다면 먼저 우리의 생각, 욕망, 관계, 재물, 시간과 계획을 예수님의 통치 아래 내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권을 거부하면서 성령의 능력만을 구하는 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세례를 받다(행 2:37-41)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렸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양심을 깨우신 것입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막연한 흥분에 머물게 하지 않고 죄를 깨닫게 하며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면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행 2:37-38).
회개는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와 관련된 말로, 단순히 감정적으로 후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전인격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오순절의 무리는 예수님을 실패한 사람이나 거짓 메시아로 보던 태도에서 돌이켜 그분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야 했습니다.
오늘날의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잠시 슬퍼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는 태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뿐 아니라 생각의 방향, 관계를 대하는 태도, 돈과 권력을 사용하는 방식까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두는 것입니다.
세례는 회개와 믿음의 공개적인 표지입니다. 세례의 물 자체가 기계적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믿음과 회개와 세례를 서로 무관한 것으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옛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세례를 통해 고백합니다.
이 약속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자녀와 먼 데 있는 모든 사람, 곧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행 2:39). 구원의 초청은 넓게 선포되지만, 실제 구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을 부르시는 역사입니다. 복음의 보편적 초청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말을 받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신도의 수가 약 삼천이나 더해졌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말솜씨가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께로 이끄신 결과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인간적인 기술만으로 만들어 내는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건입니다.
말씀과 교제와 떡과 기도로 세워진 교회(행 2:42-47)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기를 힘썼다고 기록합니다(행 2:42). 이것은 성령으로 태어난 교회의 기본적인 모습입니다.
첫째,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 세워졌습니다. 초대교회는 체험만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말씀을 배우는 일에 힘썼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사도적 복음이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성령과 말씀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하십니다.
둘째, 성도들은 서로 교제했습니다. 교제는 헬라어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로, 단순히 함께 식사하거나 친목을 나누는 것보다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믿음과 물질과 고난을 함께 나누는 공동 참여를 뜻합니다. 교회는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사교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가족입니다.
셋째, 그들은 떡을 떼었습니다. 이 표현은 일반적인 공동 식사를 포함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성찬적 교제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 구체적인 형식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성도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로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넷째, 그들은 기도에 힘썼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배우는 공동체인 동시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의 공동체입니다. 기도가 사라지면 교회는 인간적인 계획과 능력에 의존하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박해를 받을 때, 일꾼을 세울 때, 복음을 전할 때 기도했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고 사람들 가운데 경외심이 생겼습니다. 표적은 사도들의 명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확증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표적의 결과는 인간에 대한 열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함께 지내며 물건을 서로 통용했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행 2:44-45). 이것을 모든 사유재산을 강제로 폐지한 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뒤이어 그들이 집에서 떡을 떼었다는 기록은 여전히 개인의 집과 소유가 존재했음을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재산의 강제적 평준화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사랑으로 궁핍한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은 말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집니다. 자기 것을 절대화하던 사람이 이웃의 필요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바른 교리를 고백해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성도를 외면한다면, 초대교회가 보여 준 성령의 공동체성과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공적인 모임과 가정의 교제를 함께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었으며,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행 2:46-47).
교회의 성장에서 마지막 주어는 주님이십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고 성도들이 말씀과 교제와 기도에 힘썼지만, 사람을 구원하여 교회에 더하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고 사랑으로 공동체를 세워야 하지만, 구원과 성장의 열매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성령이 세우시는 교회로 살아가라
사도행전 2장은 교회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이나 사회적 필요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자 제자들은 여러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성경을 풀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증언했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와 떡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며, 서로의 필요를 돌보는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성령강림이 맺은 열매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도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하지만, 성령의 능력을 인간의 성공이나 감정적 흥분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리스도가 높아지고, 복음이 선포되며, 죄인이 회개하고, 성도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의 필요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먼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과 참된 교제를 나누며, 기도와 예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교회는 완성된 이상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에는 박해와 갈등, 위선과 차별, 교리적 논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 속에서도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교회를 고치시고 복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다음 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만납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는 다락방이나 예배의 감격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의 고통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는 복음을 말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상처 입은 세상 가운데 걸어 들어갑니다.
성령은 지금도 교회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높이고, 죄인을 회개시키며, 말씀과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능력을 구하기 전에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언하고, 말씀과 기도에 힘쓰며, 서로의 필요를 사랑으로 돌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순절에 태어난 교회의 모습이며,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조회수: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