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을 향해 다시 시작되는 예수님의 사역
- 본문: 사도행전 1:1-26
- 핵심 구절: 사도행전 1:8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 제자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한 단순한 초대교회사만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어떻게 계속되는지를 보여 주는 복음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1장은 그 장대한 역사의 출발점입니다.
이 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 성령의 약속, 세계 선교의 명령, 승천, 제자들의 기도, 유다를 대신한 맛디아의 선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모든 사건은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자신의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베드로나 바울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능력이나 초대교회의 열심도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살아 계셔서 성령으로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행전 1장은 교회가 누구에게서 시작되었으며, 무엇을 기다려야 하고,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행하시는 일(행 1:1-3)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자신이 먼저 쓴 글을 언급합니다.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이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을 기록했다면, 사도행전은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계속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일을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의 “시작하심부터”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완결된 구원 사건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속을 완성하셨지만,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사역은 성령과 교회를 통하여 계속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자기 사업을 벌이는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일하시는 현장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상한 자를 돌보고, 죄인을 회개로 부르며, 말씀을 가르칠 때 그 일을 통하여 주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이어 가십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뒤 “확실한 많은 증거”로 살아 계심을 나타내셨다고 기록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제자들의 간절한 소망이나 종교적 상상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건 위에 세워졌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기간은 제자들의 상처와 두려움이 치유되고, 부활의 사실이 확증되며, 그들이 앞으로 감당할 사명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공하는 방법이나 조직을 확장하는 기술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도행전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정치적 힘으로 건설하는 지상 왕국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가 무너지며,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는 구원의 통치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오늘의 교회도 하나님 나라보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은 언제나 같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모으고 영향력을 확대했더라도 그리스도의 통치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교회의 참된 성장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복음으로 변화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있습니다.
떠나지 말고 약속을 기다리라(행 1:4-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성령의 강림입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제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제자들에게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재판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입니다. 제자들의 실패와 부끄러움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흩어져 몸을 숨기는 것이 더 현명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장소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언제나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에게는 이미 부활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들었고, 세상으로 나가야 할 사명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움직여서는 안 되었습니다. 옳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즉시 행동하는 것이 언제나 믿음은 아닙니다.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순종이고, 머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적극적인 믿음의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을 기다렸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기다렸으며, 선지자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손을 놓고 있는 무기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자신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기다리는 동안 모였고, 기도했으며, 말씀을 살피고 공동체의 질서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위하여 자신을 정돈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열심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지식, 조직의 효율성, 재정의 풍성함, 성도의 열심이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성령의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 교회는 세련된 종교 단체는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의 증인 공동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때를 묻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주님(행 1:6-8)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지금인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기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로마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확인한 제자들은 이제 민족적·정치적 회복의 때가 온 것이 아닌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 자체를 조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와 때는 아버지의 권한에 속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비밀한 시간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분명한 사명이었습니다.
사람은 때를 알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사명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언제 이루어집니까?”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그때까지 너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고 시대의 징조를 해석하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현재의 순종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이자 지리적 개요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의 복음 전파는 이 순서를 따라 진행됩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고, 마침내 당시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로마까지 이릅니다.
여기서 “권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δύναμις)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과시하거나 개인의 욕망을 성취하는 힘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이기고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약한 사람을 유명하게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을 드러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증인”은 자신이 만들어 낸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고 들은 사실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들은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사도들의 증언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세상에 전합니다. 교회가 전해야 할 중심은 성공 철학이나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장 가까운 곳이면서 제자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유대는 익숙한 동족의 땅이었고,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적대하고 경멸하던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땅끝은 언어와 문화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세계입니다. 복음은 친숙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원수로 여겼던 사람과 낯선 사람에게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의 여러 활동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교회의 존재 방식입니다. 성령을 받은 교회는 필연적으로 경계를 넘어갑니다. 교회가 자기 내부의 안정과 만족만을 추구한다면 사도행전 1장 8절의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모으실 뿐 아니라 보내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왕(행 1:9-11)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지셨고 구름이 그분을 가렸습니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사라지신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높임을 받으시고 만물의 주로 통치하시는 왕이 되셨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인도한 구름, 시내산을 덮은 구름, 성막과 성전에 가득했던 구름이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셨다는 것은 그분이 우주 공간의 어느 지점으로 이동하셨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 안으로 높임을 받으셨다는 선언입니다.
승천은 예수님의 부재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임재를 뜻합니다. 지상 사역 동안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특정한 장소에 계셨지만, 승천하신 뒤에는 성령으로 모든 교회와 함께하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도 자기 백성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흰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지 말라고 일깨웠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재림은 막연한 종교적 희망이 아니라 승천 사건과 연결된 확실한 약속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바로 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은 하늘만 바라보며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기 때문에 오늘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종말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더욱 책임 있게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교회는 두 방향을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복음을 들어야 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잊은 교회는 세속화되고, 땅을 외면하는 교회는 무책임해집니다. 참된 교회는 하늘의 소망을 품고 땅에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한 공동체(행 1:12-14)
제자들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본문은 그 거리를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안식일에 이동할 수 있다고 여긴 가까운 거리를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승천의 현장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다락방에는 열한 사도와 여러 여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이 함께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기록합니다. 초대교회는 화려한 건물이나 정교한 조직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붙들고 함께 기도하는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였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성격과 생각과 취향에서 똑같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과거는 달랐고 성격도 달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질이 달랐고, 열심당원 시몬과 세리 출신 마태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쉽게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약속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인간적인 친밀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같은 복음을 믿으며, 같은 사명을 바라볼 때 이루어집니다. 교회가 개인의 주장과 취향을 중심에 놓으면 분열하지만, 그리스도와 복음을 중심에 모시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이 기도 공동체 안에 있었습니다. 누가는 마리아를 기도의 대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마리아 역시 다른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신자로 서 있습니다. 또한 과거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던 아우들도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공동체에 참여합니다. 부활은 의심하던 가족까지 변화시켰습니다.
성령강림 이전의 교회가 한 일은 기도였습니다.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기도했고, 일꾼을 세울 때도 기도했으며, 박해를 받을 때도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기도를 행사 시작 전에 형식적으로 드리는 순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자신들을 연결하는 교회의 호흡이었습니다.
실패의 자리를 말씀으로 회복하다(행 1:15-20)
당시 모인 무리의 수는 약 백이십 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가운데 일어나 가룟 유다의 배신과 죽음, 그리고 비어 있는 사도의 자리에 관하여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제 공동체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를 회복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실패를 복음 안에서 직면하고 주님의 은혜로 회복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실패를 숨기고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품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은혜로 다시 세워졌음을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공동체를 섬길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의 배신을 단순한 사고나 조직상의 불행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다윗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1장 20절에서 인용된 말씀은 시편 69편 25절과 시편 109편 8절에 해당합니다. 첫 말씀은 배신자의 거처가 황폐해질 것을, 둘째 말씀은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할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유다에게 책임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서로를 제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악으로 무너지지 않지만, 악을 선택한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유다는 자신의 탐욕과 불신으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배신마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을 사용하신다고 해서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는 악이 하나님의 뜻을 최종적으로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유다는 사도의 자리를 버렸지만, 복음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상실과 배신을 경험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떠나고, 지도자가 무너지며, 공동체 안에 깊은 상처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교회는 인간적인 분노와 소문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무너진 질서를 바로 세우며, 복음의 사명을 계속 감당해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을 세우다(행 1:21-26)
유다를 대신할 사람에게는 분명한 자격이 요구되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의 승천까지 줄곧 제자들과 함께 다닌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는 사도적 직분의 독특성을 보여 줍니다. 사도는 단순히 열심이 많거나 지도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직접 목격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도록 특별히 세움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사도들과 동일한 의미의 권위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그 증언이 기록된 성경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는 별명도 가진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말씀에 근거하여 자격을 살피고, 공동체 안에서 후보를 세우며, 마지막 선택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제비를 뽑은 것은 운이나 점술에 자신들의 미래를 맡긴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구하는 당시의 방식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오늘날 모든 직분자를 제비로 선출해야 한다는 규범으로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중심은 방식 자체보다 공동체가 사람의 인기나 정치적 계산을 앞세우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는 데 있습니다.
제비는 맛디아에게 돌아갔고, 그는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갔습니다. 성경은 맛디아의 선택을 실수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등장하기 때문에 맛디아의 선출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근거도 본문에는 없습니다. 누가는 맛디아가 열한 사도와 함께 계수되었다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열두 사도의 수가 회복된 것은 단순히 조직의 빈자리를 채운 일이 아닙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메시아 안에서 자신의 언약 백성을 새롭게 모으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앞두고 열두 사도가 회복된 것은 새 언약 공동체가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갖추었음을 보여 줍니다.
성령을 기다리며 증인의 삶을 준비하라
사도행전 1장에는 아직 오순절의 불도, 방언도, 수천 명의 회심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눈에 띄는 기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세계 선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승천하신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말씀을 따라 공동체의 상처와 빈자리를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약속을 믿으며,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공동체를 정돈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오순절의 능력은 원하면서도 사도행전 1장의 기다림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많은 열매는 바라면서도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수고는 부담스러워합니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도하면서도 가까운 예루살렘의 상처와 두려움은 마주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준비된 증인을 사용하십니다. 준비되었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사람이었고, 제자들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 회복과 연결하여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에게도 각자의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피하고 싶은 장소, 실패의 기억이 남아 있는 자리, 다시 돌아가기 두려운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주님은 바로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능력이 끝나는 자리에서 성령의 능력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다시 붙들어야 할 것은 새로운 유행이나 인간적인 전략보다 사도행전 1장의 질서입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성령의 약속을 의지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며, 부활의 복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교회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교회 가운데 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가장 가까운 예루살렘에서부터 낯선 사마리아를 지나 땅끝까지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만 묻지 말고 오늘의 사명에 순종하십시오.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십시오. 하늘만 바라보고 서 있지 말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십시오. 상처와 실패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말씀 안에서 다시 질서를 세우십시오. 무엇보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여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십시오.
사도행전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일하시는 곳마다 사도행전의 복음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오늘 그 역사의 자리로 부름받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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