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장 묵상

마태복음 6장 개요


5장부터 시작된 산상수훈이 6장에서 정점에 이른다. 가장 중요한 내용들이 6장에서 다루어진다. 산상수훈의 구조상 주기도문은 메시지의 중심에 있다.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앞 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진다. 5장이 주로 천국 시민이 행한 자세에 대한 것들이라면 6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7장으로 넘어가면 이웃과의 관계, 선한 삶에 대한 부분이 언급된다.

마태복음 6장 구조

1-4절 구제에 관하여
5-15절 기도에 관하여
16-18절 금식에 관하여
19-24절 보물은 하늘에 쌓아라
25-34절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장 묵상

1-4절 구제에 관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는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도는 목표가 잘못된 것이다. 구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사람에게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은 사람을 향한 것이기에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처음은 순수하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 사람의 관심을 받으려 한다. 순수한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처음 마음을 잃으면 안 된다.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제하는 행위를 ‘외식’이라 말합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거짓행위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 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거짓으로 속이고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다. 결국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2절)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 한다. 반대로 그는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구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영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왼손이 모르게 하여

오른손은 전체 전부를 뜻한다. 또한 얼굴처럼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왼손은 부정한 손이며, 하찮은 것이다. 그런데 대표격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난 오른손이 자신의 하는 일을 어떻게 숨길 수 있을까? 그만큼 은밀해야 한다는 말이다.

은밀하게 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밀함이란 사람에게 숨기고 하나님께 드러낸다는 말이다. 구제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은밀한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6장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

5-15절 기도에 관하여

외식하는 자와 같이

다시 외식이 드러난다. 외식은 가면이다. 속과 겉이 다르다. 왜 그렇게 할까? 속이려는 이유다. 기도할 때 외식하지 마라. 속이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외식하는 자들은 기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5절) 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지 않나? 그런데 왜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일까? 자신이 경건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허영심, 명예 때문이다. 거짓된 자들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그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많은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곳에서 기도하여 자신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네 골방에 들어가

‘네 골방’이다. 기도는 자기만의 기도 처소가 있어야 한다. 그곳은 단지 장소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배타적 장소와 배타적 시간도 함께 의미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장소와 시간이 있을 때 진정한 기도가 시작된다.

골방의 헬라어 타메이온(ταμεῖον) 신약에서 네 번 사용된 단어다. 한 번은 이곳에서 다른 세 곳은 마 24:26, 눅 12:3, 12:24에서 사용된다. 큰 의미 있는 단어는 아니다. 조용하고 숨겨지고 은밀한 깊은 방을 뜻한다. 특히 눅 12:3은 골방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

  • 눅 12: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 되리라

골방은 자기만의 은밀한 공간을 뜻한다. 구제나 기도는 골방에서 하든 은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밀곳의 일도 모두 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보신다.

중언부언

기도의 또 다른 어폐는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않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많은 말’이다. 많은 말은 업적을 뜻한다. 기도의 양과 응답이 정비례라고 생각하며 많이 기도하면 응답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도는 양보다 질이 우선이다.

하지만 분명히 일어야 할 것은 기도가 깊어지면 질과 함께 양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오래 있고 싶어하든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오래 기도하게 된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많은 말로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를 관철 시키려는 마음은 매우 인간적인 생각이며 탐욕적이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께 있다.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본받지 말라'(8절) 하신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외식이든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것으로 통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해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아신다. 기도의 의도도, 목적도 아신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진정한 친교를 원하신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그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9-13절까지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중심이자 핵심이다. 주기도문 이전과 이후로 갈리면서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핵심과 목적을 보여주신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앞선 ‘본받지 말라’는 말과 역으로 ‘본받으라’는 뜻이다. 우리가 본받아야할 기도는 주기도문에 담겨 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다루고 후에 주기도문을 깊이 다룰 것이다.)

  •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원문은 정확이 ‘아버지여 우리의 하늘에 계신’이다.

  •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아버지란 호칭은 혁명적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곳이 몇 곳이 있지만 그곳은 직접 부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해 직접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곳은 예수가 처음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혁명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아버지는 친밀함을 뜻한다. 관계의 변화가 일어났다.

하늘은 초월적 장소다. 유대인들은 하늘에 삼층으로 되어 있다 믿었다. 가장 높은 삼층에 하나님에 계신다. 그곳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하나님만의 배타적 공간이다. 하지만 이제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며, 엄밀하게 ‘하나님의 왕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신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곳이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도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말씀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한다.

일용할 양식

20년 전에 어떤 목사님 요즘은 굶은 사람이 없다고 말한 적으로 들은 적이 있다. 불과 수년 전에도 어떤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셨다. 세상을 참 모르는 사람이다. 지금도 세상에는 굶은 사람이 정말 많다. 예전처럼 많지 않아도 많이 굶는다. 다만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숨기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나라에서 숨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용한 양식은 하루하루 살아갈 음식을 뜻하지만, 날마다의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기도 하다. 6장 후반부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생 전체가 먹고 사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일요한 양식을 언급할 때 곧바로 출애굽 당시의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이스라엘을 기억한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굶지 않게 하셨다.

죄 지은 자를

기독교인의 용서를 말한다. 나에게 죄를 지은 자를 먼저 용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 하신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인이 있을까?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또한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 맞을까? 이 부분은 많은 고민과 생각이 필요하다. 예수님도 친히 저주하셨고, 심판을 경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 빠지지 않게’로 직역 된다. 그래서 종종 영어 및 다른 번역은 악을 인격체로 보고 ‘사탄’ ‘마귀’ 등으로 번역한다. 악에 빠진다는 말은 악에게 지배 당한다는 뜻이다. 악에게 조종 당하기 때문에 악을 인격체로 보면 사탄과 마귀가 된다.

이 부분은 정확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 되는 나라와 반대되는 것으로 악에게 지배 당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16-18절 금식에 관하여

이 부부은 1-4절과 대응한다. 구제와 기도에 이어 금식으로 이어진다. 금식은 하나님께 하는 기도와 동일한 맥락이다. 여기서 ‘사람들에게’가 빠져 있다. 하지만 하반부에 ‘사람에게 보이려고’가 등장하면서 외식에 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금식은 일종의 헌신이다. 특별한 이유 때문에 금식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끊고 하나님만을 보기 위하여 금식하기도 한다. 세상(음식)이 주는 쾌락을 끊고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이다.

19-24절 보물은 하늘에 쌓아라

보물을 어디에 쌓을까

여기서는 두 가지가 주제다. 하나는 ‘보물’, 다른 하나는 ‘어디’이다. 보물을 쌓아둘 곳이 하늘인가 땅인가. 하지만 문장을 잘 살피면 보물이라기보다는 어떤 것을 보물이라 생각하느냐의 문제다. 왜냐하면 땅에 쌓은 보물은 하늘에 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전혀 다른 개념이다. 대부부의 주석가들은 하늘에 쌓은 보물은 앞서 소개된 구제와 기도 등으로 돌린다. 이런 것은 상에서 쌓을 수 없다. 또한 땅에서 권력, 보석, 등을 보석으로 생각하는 것과 반대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보물은 무엇을 보물로 보느냐의 문제다.

하늘에 쌓아 두라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다. 즉 하나님이 보물로 여기시는 것을 하라는 말이다. 땅은 도적이 많고 동록, 즉 썩는다.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이 땅은 도둑이 있다. 도둑질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어리석은 자는 이 땅에 보물을 쌓음으로 모두 잃어 버린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하늘에 쌓음으로 그대로 보존된다.

보물과 마음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신다. 마음이 있는 곳은 보물이 있는 곳이다. 무엇을 보물로 생각하느냐가 그 사람의 행위를 결정한다. 세상의 부와 권력이 보물이라면 땅에 쌓을 것이고, 구제와 선이 보물이라면 하늘에 쌓을 것이다. 예수님은 영생을 묻는 젊은 관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확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눅 18:22)

두 주인

보물의 문제는 결국 주인의 문제로 돌아간다. 보물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자신이 소유 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땅과 하늘은 단지 장소의 개념이 아닌 종속의 문제요 소속의 문제다. 땅에 속한 자는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고, 하늘에 속한 자는 구제하고 사랑을 실천한다. 땅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는 땅이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한다. 축적하고 자신의 재산과 부를 불려 간다. 하지만 하늘에 보물을 쌓으려면 이 땅에서 헤쳐야 한다. 나누고 섬김으로 땅에서 재물을 소유하지 못한다. 문제는 땅에서는 쌓지만 도둑질을 당하고, 하늘은 흩지만 점점 보물을 쌓아간다.

두 주인을 같이 섬길 수 없다.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착각한다. 같이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느 순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야할 때가 온다. 그 때는 많이 늦었다.

25-34절 염려하지 말라

무엇이 중한가

25절부터는 결론에 해당된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소유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이다. 주님은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하신다.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염려하지 않아야 하는가?

첫 번째 근거는 무엇이 중한가를 생각하라. 목숨과 음식, 몸과 의복을 비교하지만 우선순위를 말한다. 음식도 목숨을 위해 먹는 거다. 의복도 몸을 위해 입는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결국 33절으로 가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 번째 근거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이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는 스스로 크고 자란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다. 공중의 새는 먹이심으로 음식에 관한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고, 들의 백합화는 입히심으로 의복에 대한 걱정을 하지 말라 하신다.

하물며

공주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풀도 꽃도 입히신다. 그렇다면 나의 자녀들인 너희는 ‘하물며’ 더 사랑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굉장히 논리적 질문이자 답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른다’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절대 그대로 두지 아니하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이다.

내일 위하여

내일은 내가 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전부다. 내일을 걱정하기 전에 오늘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주님은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내일을 걱정하기 보다 오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해야 한다 말씀하신다.

먼저 구하라

33절은 6장 전체의 핵심이자 답이다. 주님은 두 가지를 주문하신다. 1)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2)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더하신다. 는 것이다. 두 주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의 부족함에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구하라는 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물질은 필요 없다는 이상한 생각을 한다. 하지만 주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하신다. 이것은 두 번째는 너의 구할 것, 즉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먼저’는 삶의 우선순위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자신의 필요라는 두 가지 앞에서 우리는 동시에 구할 수 없기에 선택해야할 때가 있다. 마치 24절 말씀처럼 두 주인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 날로 족하니라

주님은 분명히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오늘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내일 요행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일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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