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묵상

마태복음 5장 개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산상수훈으로 불려지는 곳입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한 다음 기나긴 강론을 사역의 초반부에 넣음으로 가르침을 앞세웁니다. 마태복음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감안하며,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법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세 장에 담아둔 것이죠. 이러한 구조를 보면 마태복음은 확실히 체계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산상수훈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 5장의 구조

1-12절 팔복 강론
13-16절 소금과 빛
17-20절 율법의 완성
21-26절 화목하라
27-30절 간음과 지옥불
31-37절 이혼, 맹세
38-48절 동해보복, 원수 사랑

마태복음 5장 강해

1-12절 팔복 강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히브리인들에게 산은 신들이 계신 곳이다. 우리나라도 신령은 산에 있듯. 특히 히브리인들에게 산은 곧 시내산과 연결되며, 시온산으로 불리는 예루살렘 역시 산이다. 산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앉으심으로 진정한 왕이심을 드러내신다.

  • 시 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가르쳐

가르치다는 4:23의 가르침을 가져왔다. ἐδίδασκεν는 미완료 직설법 3칭으로 오래전부터 가르쳐 왔고 아직도 여전히 가르치고 있음을 의도한다. 이 가르침은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 계속하여 이루어져야 할 사명이 된다.

  • 3절 심령이 가는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복이 있나니

Μακάριοι는 그냥 우리가 아는 복이다. 70인역도 구약의 복을 μακάριος로 번역했다. 너무 큰 의미는 두지 말아야 한다. 복은 매우 포괄적이며, 상대적이다. 신약에 있어서는 복이 대부분이 육신적인 의미보다 영적인 부분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복이 아닌 복들로 복수형태로 사용되었다.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구절은 시편 1편 1절을 연상시킨다.

LXX 시편 1:1 μακάριος ἀνήρ ὃς οὐκ ἐπορεύθη ἐν βουλῇ ἀσεβῶν καὶ ἐν ὁδῷ ἁμαρτωλῶν οὐκ ἔστη καὶ ἐπὶ καθέδραν λοιμῶν οὐκ ἐκάθισεν

가난한 자는

구약에서 가난은 저주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들에 대한 저주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역설하신다. 복음 안에서 가난은 저주가 복이 되어 바뀐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의 시작이다. 가난은 양식의 부재와 권력과 친구의 부재 등 다양한 사회학적 요소까지 포괄한다. 즉 사회적 약자인 동시에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가난은 역치된다.

심령이

누가복음은 심령이 빠지고 가난한 자로 소개된다. 하지만 마태는 심령을 넣음으로 좀더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 한다. 심령은 마음 그 자체다. 심령으로 번역된 단어는 프뉴마(πνεῦμα)이다. 영으로 번역되는 단어다. 이사야 66:2절과 비교하면 신약적 의미가 보강된다.

  •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가난은 제2성전기 문헌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다는 점에서 신약의 의미를 제공한다. 즉 부유한 자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부를 쌓지만 가난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들이 치르는 대가로 받아들여졌다. 솔로몬의 시편이나 다마스커스 문헌(쿰란 문헌)에 의하여 가난은 종종 의로운 자로 치환된다.

천국이 저희 것이요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엄밀하게 천국의 백성이 되지만 능동형으로 사용하여 천국을 소유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은 왕국이다. 바실레이아(ἡ βασιλεία)는 왕들이 다스리는 왕의 나라를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의 왕국이다. 나라는 썩 좋은 번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다’는 ἐστιν을 사용하여 현재형으로 이미 왕국을 소유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가난한 자가 가장 많은 부와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놀라운 역설이다.

애통하는 자

애통은 가난한 자의 애통이다.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음으로 버려진 존재이다. 고아의 눈물, 과부의 애통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위로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들의 보호자가 되시고, 남편이 되어 주실 것이다. 애통을 죄에 대한 애통으로 과도하게 축소 시켜서는 안 된다.

온유한 자

가난과 애통이 내재적 요소라면 온유는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온유는 타인을 대할 때 부드럽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타인을 부드럽게 대하는 자들은 땅을 얻게 될 것이다. 땅은 영역이며 영향력이다. 타인의 비방과 모욕을 부드럽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는 곧다 바르다는 뜻이다. 구약적 의미는 하나님의 계명, 율법 대로 행하는 것이 의다. 신약에서 의는 죄를 없이함을 뜻한다. 의롭게 된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의롭게 된 자이다. 신약의 의가 구약의 츠타카를 번역한 것을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의의 주림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려는 욕망,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열정을 뜻한다. 이 구절은 6장 33절과 맟닿아 있습니다.

  •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13-16절 소금과 빛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은 짜다. 부패를 방지한다. 하지만 구약에서 소금은 불변성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소재로 소개된다.

  •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세상은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진다. 소금이 없다면 제물은 드려질 수 없다. 소금의 다양한 의미를 너머 본문 안에서 소금은 제의적 의미를 가진다.

그 맛을 잃으면

이 부분은 바위 소금을 언급한다. 바위 소금은 돌과 섞여 있어 염화나트륨이 빠져 나가도 유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바위 소금만을 사용하고 일반 바다에서 나오는 소금을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서쪽이 지중해이고, 요단강 하류에 소금이 모여 있는 염해 또는 사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그런 소금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소금이 제 기능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소금이 짜지 않다면 소금이 가지는 목적,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에 쓸모 없어진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짠 맛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거룩이다.

세상의 빛

빛은 분별하는 것이다. 빛이 없다면 모든 것이 분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빛이 오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행함으로 세상이 악하다고 심판한다. 빛은 옳은 행위며, 진리를 드러내는 삶이다. 16절에서 ‘착한 행실’를 보는 것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으므로 더욱 명확해 진다.

17-20절 율법의 완성

율법을 완전하게

신약 시대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흔하게 주장하는 구절이다.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이 부분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한다.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가?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거룩을 이상한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룩은 말씀대로의 삶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목적은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완성하다의 헬라어 프렐레오-(πληρόω)은 영어성경은 채우다( fill, fulfill) 또는 마치다(complete) 란 의미로 번역했다. 완성은 부족한 상태였지만 완전히 채워져 더 이상 채울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완성의 의미를 갖는다. 즉 완성된 것이다.

율법의 완성이 무엇일까? 율법이 요구하는 것, 목적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거룩’으로 되돌아 간다. 문제는 그것을 일반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이 모두를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율법의 완성 안에 있게 되고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십자가의 사건을 말한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은 거룩한 삶을 요구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임으로 율법의 효력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다는 으미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R. T. 프랜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과정 속에서 율법의 특정 요소가 모든 현실적 목적에서 ‘폐지된’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라도, 이는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지위를 상실한 것 때문이 아니라 성취의 시대에 이들의 역할이 변화되었기 때문이고, 이 시대에는 성취자인 예수, 율법이 그에 대해 미리 말하고 있던 예수가 궁극적인 권위자인 것이다.” ( 마태복음 (부흥과개혁사))

해설이 시원하지 않다. 프랜스는 ‘성취’라는 단어를 선호하다. 일단 다름 구절로 넘어가 보자.

율법 – 다 이루리라

18절은 앞선 구절인 17절을 보강한다. 예수는 율법의 폐지가 아닌 성취로 해석했고, 다 이루어지리라 말씀하신다. 율법은 버려지지 않고 완성됨으로 목적을 달성하게 되고 다 이루어 진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계명이며 약속이다. 발화된 말씀은 그 목적을 달성한다.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율법이 의도한 바는 명확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 받는 것이다. 여기서 자꾸 율법의 점과 획에 신경 쓰면 안 된다. 히브리어는 모음을 쓰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작아도 반드시 실행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실현,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내용은 19절에서 재차 강조된다.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동등하게 소중하다. 모두가 진리고, 모두가 가치가 있다. 어떤 말씀을 버리고 자신이 편한대로, 욕망대로 취사선택하는 것은 악이고 죄이다.

너희의 의

신약에서 의는 종종 거룩한 삶,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다. 그 삶은 ‘구제’이다. 이 부분은 후에 따로 다룰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너희의 의’는 율법이 의도한 수동적 삶을 너머 적극적으로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서기관들은 무엇을 하지 않았으므로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았음으로 ‘거룩하다’ 말한다. 하지만 제자들-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능동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기존의 수동적 의를 넘어서야 한다. 복음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그는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21-26절 화목하라

옛 사람 – 나는

예수님은 자신을 구약의 율법과 비교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로운 율법의 창시자로 소개한다. 나는 율법을 대신할 새로운 계명을 선포한다.

노하는 자마다

살인은 타인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부정하고, 그를 통해 이루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무너뜨린다. 예수님은 이제 노하고 라가라 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신다. 결국 형제를 몹쓸 자로 비판하고 차별하는 자는 그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다.

먼저 가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삶이 받쳐 주어야 한다. 삶이 없는 예배는 열납 되지 않는다. 예배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형제와 화목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목하러 이 땅에 오셨다. 먼저는 하나님과 죄인들을, 그 다음은 사람과 사람들이 화목하기를 바라신다. 화목 없는 제사는 열납 되지 않는다.

27-30절 간음과 지옥불

이 부분은 보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고, 오른 눈이 언급된다. 눈은 보는 기관이다. 봄으로 마음의 욕망이 나온다. 간음은 보는 것과 연관되어 숨겨진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역할을 한다. 하와의 타락과 구약의 수많은 악들이 ‘보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지적한다.

간음하지 말라

간음(μοιχεύω)은 결혼한 여자나 약혼한 여자와 성**를 맺는 것이다. 결혼 제도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제 음욕의 문제로 들어간다. 음욕으로 번역된 에피뚜메오(ἐπιθυμέω)는 갈망 욕구를 뜻한다. 인간이 욕구를 가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목사나 학자들이 이 부분을 여자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괜찮지만 성적 갈망을 가지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릇된 해석이다. 난 그게 가능한지 알 수 없으며, 예수님 또한 그렇게 의도하지 않으셨다. 이곳은 욕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옛사람이 욕구는 있으나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했지만 이제는 욕구 자체를 가진 것을 정죄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결국 변화된 본성, 성령이 지배하는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이미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찍어 내버리라

무서운 말씀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범죄 하는 것보다 지옥불에 던져 지지 않은 것이 나을 것이라 하신다. 눈을 빼고 손발을 찍어 내도 욕망을 사라지지 않는다. 즉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부분은 모순을 안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아마 다른 의도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오른 눈(29절)과 오른 손(30절)은 전체를 대표한다. 즉 오른 눈과 오른 손이 아니라 전체를 말한다. 어느 지체이든 죄를 범하는 데 사용되었다면 버려야 한다. 실제로 눈과 손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백체 중 하나’ 와 ‘온 몸’을 비교하고 있다. 온 몸은 삶 전체로 전위 되어 죄에 종속된 상태를 뜻한다. 그렇다면 오른 눈과 오른 손은 시작, 처음, 초기를 뜻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31-37절 이혼, 맹세

이혼증서

모세에 의하여 시작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여성이 이혼 증서 없이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줌으로 합법적으로 갈라서도록 허락했다. 이혼 증서를 가진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는 법적 독립성을 갖게 되고, 재가 할 수 있다.

  • [신 24:1-4]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모세는 여기서 재가한 여성이 다시 이혼을 당해 홀로 있을 때 전 남편이 그녀를 데려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성적으로 문란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이혼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법적이며, 구약에서도 이혼은 보편화 되어 있었고, 신약에서도 여전히 당연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내를 버리면

다시 음행의 문제로 나아간다. 예수님은 음행 외의 일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합의 이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당시 유대 사회는 아내를 마음대로 버렸다. 좋은 싫든 남편이 버리면 끝이다. 버림 받은 여성은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이혼을 금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당시의 상황 속에서 너무나 흔한 이혼이 아닌 아내의 버려짐을 금지하기 위해 반대하신 것처럼 하신 것이다. 여성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성적인 차원에서 여성을 보호하여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도록 하셨다.

헛 맹세

구약에서는 맹세가 허락되었다. 아니 권면 사항이었다. 하지만 오용되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했고, 조롱하듯 맹세했다.

신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맹세의 피폐를 아셨기에 이제 맹세를 금지하신다. 맹세는 자신의 말에 신용이 없을 때 타인의 이름을 빌려 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름이 온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여호와이시다. 함부로 여호와의 이름을 빌려 맹세를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불명예를 준다. 이것은 악이다. 이제는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하라고 명하신다.

38-48절 동해보복, 원수 사랑

눈은 눈으로

동해보복은 피해를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다. 동해보복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동해보복은 잔인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보복을 하는 것으로 복수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누군가 당신의 뺨을 한 때 때렸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상대방의 빰을 한 대 때리면 분이 풀릴까? 그렇지 않다. 세 대 네 대를 때려 분이 풀린다. 아니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동해보복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가해자를 보호하는 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의 법은 어떤가? 누군가 나의 돈 100만 원을 훔쳤다면 법은 훔쳐간 사람을 약소한 벌금으로 벌하고 나에게는 100만 원을 돌려 주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잘못된 법인가? 그러니 가해자만 좋은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훔친 물건은 세 배 네 배 다섯 배를 더해 보상해야 한다. 피해를 줄 경우는 피해를 받은 그대로 돌려 줌으로 상해를 입히는 것을 금지함으로 감정의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πονηρός는 악한 자 또는 악을 말한다. 뿌리가 되는 πόνος는 ‘갈망’, ‘욕망에 사로잡힌’의 뜻과 ‘고통’이 함께 있다. 이것은 마치 마약에 중독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속하여 마약을 갈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문제는 그러한 악한 자가 나에게 해를 가할 때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구하는 것을 다 주고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수고하여 모은 재산을 거지가 달라고 하면 다 주어야 하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 구절들은 결국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위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유대인들의 이웃은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이나 헬라인 등 이방인들은 이웃으로 보지 않는다. 이 부분은 율법사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원수로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신다. 그러므로 원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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