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 개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40일 동안 금식하십니다. 금식 후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신 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제자를 부르시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십니다. 4장부터 본격적인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고, 제자들을 부르시며, 치유 사역이 담겨 있습니다. 4장은 단순한 몇 가지의 사건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전체 사역을 요약해 놓은 듯한 인상을 줍니다.
마태복음 4장 구조
1-11절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신 예수님
12-17절 공생애를 시작하시다.
18-22절 첫 번째 제자들
23-25절 병자들을 고치시다.
마태복음 4장 묵상
1-11절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신 예수님
성령에 이끌리어
이 부분은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광야로 갔고, 그곳에서 무려 40일 동안 금식을 하십니다. 이 고통을 무엇으로 다할 수 있을까요? 또한 금식 이후에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그렇다라고 너무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닥친다면 우리는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를 고통의 자리, 슬픔의 자리로 이끈다면 우리는 순종할 수 있을까요?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가 어떠하든, 그곳이 어디이든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따라갔습니다.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합작품이며, 한 마음과 뜻으로 이루신 위대한 기적입니다.
시험을 받으로 광야로 가사
우리는 곧장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지냈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불순종으로 일관했습니다. 늘 불평했고, 불만을 표시했고,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엎드렸습니다.
민수기 14:29-34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예수님의 첫 사역의 시작, 아니 사역을 시작하기 전 먼저 테스트를 받아야 했습니다. 불순종의 이스라엘이 아닌 순종의 모습으로 인류를 대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시험을 받으로 아무 것도 없는 광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주리신지라
사십일을 금식하신 후 배가 고픕니다.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은 얼마든지 먹을 수도 있고, 편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당하는 아픔과 고통을 그대로 느끼셨습니다. 인간이 가야할 길, 당하는 고통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닥뜨리셨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동정하다(συμπαθέω)
히 4:15과 10:34 두 번 사용된 단어다. ‘파스코(πάσχω)’라는 동사에서 왔다. 파스코는 ‘고통을 받다’ ‘고통을 느끼다’ ‘경험하다’ ‘공감하다’ 등의 의미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예수님이 반드신 시험은 바로 이 구절입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우리는 왜 이것이 중요한지 이해를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육화, 즉 하나님을 뜻합니다. 사단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무모하고 교활한 도전입니다.
마귀에게 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마귀에게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질문하는 내용이며,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도 사람들이 조롱하고 물었던 질문입니다.
마 27: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어쩌면 이 시험은 마귀와의 시험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 그 육신의 본성을 거슬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신 구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는 싸움입니다.
첫 번째 시험: 돌들이 떡덩이게 되게 하라
마귀는 예수님의 굶주린 것을 알았기에 가장 먼저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 말합니다. 이 시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행한 원망으로 소명보다는 육신적 안락을 추구하고, 쾌락을 갈망했던 그릇되고 왜곡된 마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아픔도 있고 고통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애굽에서의 배부름만을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의 삶의 행복했을까요?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먹는 것을 크게 고통 당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괴로웠습니다. 하루종일 막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자녀들을 나일강에 던져야 하는 아픔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애굽에서의 삶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돌이 떡이 되는 유혹의 실체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사명을 잊게 하고, 지금 당장의 일에 물두하여 쾌락을 즐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첫번째 시험의 답은 신명기 8:8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모세가 광야의 시간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모압 광야에서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행한 설교의 일부분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준 사실입니다.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첫 번째 마귀의 시험인 소명을 잊어 버리고 현실의 쾌락에, 지금 당장의 필요에 집중하라는 요구에 대한 답입니다.
현실에 함몰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지키신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준 사명을 기억하라
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여러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합니다. 이럴 때 현실에 안주하거나, 고통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두 번째 시험: 뛰어 내리라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로 예수님을 데려가 뛰어 내리라 말합니다. 그 근거는 시편 91:11-12 말씀입니다.
시 91:11-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편의 말씀은 온갖 어려움과 시험을 당하는 자들이 여호와를 지존자로 삼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사단은 원래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성경의 일부만을 가져와 뜻을 왜곡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 시키고 왜곡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포괄적으로, 전체적으로, 맥락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단지 기록된 문자의 일부분만을 발췌하여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하지 말라
두 번째 시험의 답은 ‘주의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7절)입니다. 이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행한 악행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출애굽기 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시험한다는 것이 도대체 뭘까요? 원어적인 의미가 아니라 출애굽기 안에서 맥락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앞서 인용한 출 17:7을 가만히 살펴보면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가 아니면 돌보지 않는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간단하게 믿음과 불신으로 극단화 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즉 불신했습니다. 이것이 시험의 핵심입니다.
세 번째 시험: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시험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람의 입장에서보면 너무나 매력적인 유혹입니다. 온 세상을 지배하는 왕의 자리를 마귀에게 절을 하면 받을 수 있다면 누가 절하지 않을까요? 누가 마귀를 경배하지 않을까요? 가장 강력하고 매력적인 유혹입니다. 파우스트의 거래가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말의 순서 보기
9절에 나타난 사단의 말을 유심히 봅시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Ταῦτά σοι πάντα δώσω, ἐὰν πεσὼν προσκυνήσῃς μοι.
- 그리고 그가말했다. 그에게(예수)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모두. 나는 너에게 준다. 만약 엎드려 네가 경배하면 나에게.
한글성경은 한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 ‘엎드려 경배하면’을 앞에 두었지만 원어는 뒤에 있고, 앞에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가 있습니다. 다시 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 이 모든 것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 만약 네가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정말 교묘하고 교활한 유혹입니다. 사단은 먼저 마음을 빼앗은 다음 조건을 제시합니다. 마음이 빼앗기면 그 다음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탁하고 모호하게 됩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잠언 4장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다만 그를 섬기라
마귀의 시험에 예수님은 다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여 반론합니다. 10절에서 인용한 구절은 신명기 6:13의 말씀입니다. 이 구절 역시 가나안을 앞에 두고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신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예수님의 응답은, 어떤 쾌락과 권력과 부위가 있어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답은 독립적인 대답이기도 하지만 앞선 마귀의 시험에 대한 포괄적인 대답이기도 합니다. 당장 필요한 육신적 필요에 따라 가는 것,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신하는 것, 권력의 유혹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마귀의 시험 | 인용 구절 | 예수님의 응답 | 인용구절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 시 91:11-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 신 6: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 신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
12-17절 공생애를 시작하시다.
요한이 잡혔음을
세례 요한을 말한다. 세례 요한이 헤롯이 빌립의 아내를 빼앗았다는 것으로 비판을 하자 화가난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두어 버린다. 일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와 종교와 상관 없어야 한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기독교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정치적이라 함은 특정 당을 지원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당을 지지하고,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 불의에 항거하여 당당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가버나움에 가시니
지금까지 예수님은 특별한 사역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제 나설 때가 되셨다고 판단하신다.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의 부유한 도시에 가버나움으로 가신다. 후에 가버나움은 예수님을 배척한다.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 목소리를 발하실 때가 된 것이다. 저자는 이사야의 말씀이 응했다고 말한다.
사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사야의 구절은 묘하다. 8장은 하나님의 율법의 사라져 어둔 시대를 말하고, 9장이 시작되면서 갈릴리가 등장한다. 아마도 갈릴리 주변 북쪽 지파들은 북왕국으로 분리되면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상실되면서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오지 않았나 싶다. 결국 말씀의 부재는 북,남의 멸망으로 기나긴 중간기를 거치면서 심화된다. 즉 한 지파나 지역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상태가 된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라
회개하라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감정적 회개가 아니다. 헬라어의 회개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되돌아서다’라는 뜻으로 유턴을 뜻한다. 회개는 생각의 돌아섬과 행위의 돌아섬이 함께 동반된 전인격적 삶의 변화를 뜻한다. 눈물 흘리며 회개했다고 말하는면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자기기만이자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다. 기독교인들이 가식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8-22절 첫 번째 제자들
그물 던지는 것은 보시니
가장 먼저 안드레와 베드로를 부르신다. 두 사람은 형제로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다. 베드로는 히브리어 페트로이다. 페트로는 반석, 거대한 바위란 뜻이다. 에서의 후손들이 살았던 에돔 지역은 바위가 많아 페트라로 불렸다.
주님은 길을 가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만나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다. 우리는 제자들을 들을 부를 때 전혀 모른 사람이 갑자기 ‘나를 따라 오너라’하며 부른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한 다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도록 부르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즉각적으로 부르고 호흥하는 것은 당시 글쓰기의 방식이지 현대의 의미처럼 부른 것이 절대 아니다. 이러한 부분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부르심의 방식을 비교 분석하여 분명해 진다.
사람을 낚는 어부
예수님은 사람들을 부르실 때 전혀 엉뚱한 무엇으로 부르거나 설명하지 않으신다. 그들의 직업인 어부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다. 부르심은 멀리 있지 않다. 나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것도 실제는 나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부르심은 현재의 삶과 멀지 않다. 바로 그 자리에서 부르신다.
되게 하리라
우리는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되다'(ποιέω)는 어떻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듯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세우신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소명은 창조다! 주체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드신다. 베드로는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미래직설법을 사용하여 강한 의지를 드러내신다.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신다. 세베대는 예수님과 친척간이다. 이들은 예수님과 친족 간이다. 후에 이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직전 어머니가 와서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요구한다. 친족 간이라는 이유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정하지 않으신다.
부르심은 소명이며, 창조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23-25절 병자들을 고치시다.
23-24절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구절이다. 먼저 예수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예수님의 중반기까지 사역은 모두 갈릴리에 집중 되어 있다.
διδάσκων ἐν ταῖς συναγωγαῖς αὐτῶν
καὶ
κηρύσσων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ῆς βασιλείας
καὶ
θεραπεύων πᾶσαν νόσον καὶ πᾶσαν μαλακίαν ἐν τῷ λαῷ.
가르치시며(디다스코 διδάσκω)
먼저 가르치신다. 가르침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전파한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같은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가르침을 회당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이 부분은 논쟁 거리다. 회당에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랍비가 되어야 하며 적지 않은 나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나이를 적어도 50정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종종 랍비로 불렸다. 랍비는 아무에게나 주는 호칭이 아니다.
전파하시며(케룻소 κηρύσσω)
케룻소는 일방전 선포에 가깝니다. 마치 전쟁을 선포한 것처럼. 선포된 것은 천국복음이다. 케룻소는 대부분 복음이 전파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단어로이다. 설득하고 대화하는 것과는 약간이 차이가 있다. 설득의 개념보다는 선포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고대 헬라어는 전령들이 왕이나 황제의 명령을 선포하는 개념으로 이 단어가 종종 사용되었다. 즉 공개적인 선포의 의미가 강한 단어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치시니(떼라페우 θεραπεύω)
예수님의 힐링, 즉 고침은 부정에서 정함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들을 정하게 바꾸신다. 질병에 걸리면 부정한 자가 되어 공동체로부터 분리 된다. 이들은 정결 의식을 통해 다시 공동체로 들어오지만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히 부정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들을 고치심으로 복음으로 모든 이들이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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