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장 묵상

외식의 신앙을 깨뜨리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정면으로 책망하시는 장입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일곱 가지 화 선언을 통해 그들의 위선, 탐욕, 형식주의를 고발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한 애통한 사랑으로 말씀을 마무리하십니다. 이 장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과 중심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구조

  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 (1-12절)
  2. 일곱 가지 화 선언 (13-36절)
  3. 예루살렘을 향한 애통 (37-39절)

마태복음 23장 중요한 주제 해설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 가장 날카로운 언어로 가득 찬 장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고 의로운 척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위에 짐을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일곱 가지 화 선언으로 고발하시며, 눈먼 인도자, 뱀,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십니다. 이들은 겉은 깨끗하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고, 의인들을 박해하며 무덤처럼 겉은 아름다우나 안은 죽음으로 가득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은 외형이 아니라 중심이며,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진리를 다시금 상기시켜 줍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눈물은, 그분의 사랑이 심판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심판이 아니라 회개에 있고, 진노가 아니라 품으심에 있습니다.

외식을 드러내는 진리의 칼날

겉으로는 경건한 듯 보이지만 속은 부패하고 위선으로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의 실상을 예수님은 한 치의 모호함도 없이 폭로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은 단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가로막는 거짓 경건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입니다. 이 말씀 앞에 오늘 우리 자신도 서야 합니다. 주님은 이중적인 신앙, 형식적인 종교성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그 경고조차도 사랑에서 나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애통이 그 마지막 절정에 있습니다.

거짓 경건에 대한 경고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은 따르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쳤지만, 그 율법의 본질을 외면한 채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만을 지웠습니다.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타인에게 경건을 강요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경건해 보이는 옷을 입고, 넓은 경문 띠와 옷 술을 자랑스럽게 보이며 회당의 윗자리와 잔치의 상석을 탐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여기서 ‘섬기는 자’는 헬라어 ‘διάκονος diakonos’입니다. 단순한 종이 아니라 사명을 가지고 봉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위선적인 지도자들은 이 섬김의 본질을 잊은 채 명예와 지위를 탐했기에, 예수님의 경고는 단호합니다. 겉모양은 아무리 경건해도, 중심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않으면 그것은 껍데기 신앙입니다. 마치 포장이 잘 된 선물인데, 열어보면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헛된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일곱 가지 화, 심판의 언어

예수님은 이어서 일곱 번에 걸쳐 “화 있을진저”라는 선언을 반복하십니다. 헬라어로 ‘우아이 ουαί’는 단순한 저주의 외침이 아니라, 통탄과 심판, 그리고 진리의 무게를 담은 경고입니다. 이 일곱 개의 ‘화’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행태를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첫째, 그들은 천국 문을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며, 들어가려는 자도 막습니다. 이는 복음을 왜곡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행위입니다. 둘째, 개종자를 얻기 위해 열심을 내지만, 도리어 그를 지옥 자식으로 만듭니다. 셋째, 맹세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성전을 경시하고 물질을 중시합니다.

넷째,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철저히 지키지만,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인 정의, 긍휼, 믿음은 무시합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섯째,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게 하나, 그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합니다. 여섯째,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일곱째,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것을 비판하지만, 결국 자신들도 그들의 피를 흘리게 될 자들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 모든 경고는 단지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식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습니다. 형식으로 신앙을 유지하고, 평가받는 자리에서는 거룩한 척하지만, 삶의 실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속을 꿰뚫습니다. 때로는 오타처럼 보이는 작은 흠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숨길 수 없는 진실로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애통

가장 날카로운 심판의 말씀을 쏟아내신 예수님은 마지막에 갑작스레 애통의 목소리로 전환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예수님의 음성에는 심판의 진노와 함께 뜨거운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품고자 하셨으나, 그들은 원치 않았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이는 성전 파괴와 민족의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은 희망의 문을 닫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는 종말의 회복과 다시 오실 메시아를 향한 고백을 기다리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무한하지만, 거절과 외식이 지속되면 결국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애통하며 말씀하십니다. “내게 돌아오라, 나의 품 안에 거하라.”

결론

마태복음 23장은 무서운 장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의 장입니다. 외식과 위선을 폭로하되, 그 이면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애끓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신앙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시지만, 그 무너짐을 통해 참된 믿음이 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신앙의 옷을 입고 있습니까? 겉모양만 갖춘 회칠한 무덤은 아닌가요?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 일터에서의 모습이 다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과 사랑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위선자들이여.” 그러나 동시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는 부르짖음도 함께 울려 퍼집니다. 우리는 그 경고를 무겁게 들으면서도,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분의 눈물과 사랑이 우리를 돌이키게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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