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으로 오신 예수, 거절당한 주권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하여 성전 정화와 권위에 대한 논쟁, 그리고 심판의 비유로 이어집니다. 종료주일의 호산나 외침과 무화과나무 저주, 그리고 두 아들과 악한 농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주권이 어떻게 거절당하고 있으며, 그 거절이 결국 심판으로 이어질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지만, 지도자들은 끝내 그를 배척합니다.
마태복음 21장 구조
- 예루살렘 입성 (1-11절)
- 성전 정화 (12-17절)
- 무화과나무 저주 (18-22절)
- 권위에 대한 논쟁 (23-27절)
- 두 아들의 비유 (28-32절)
- 악한 농부의 비유 (33-46절)
마태복음 21장 중요한 주제 해설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의 왕 되심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며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십니다. 이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왕은 세상의 권력을 지닌 자가 아닌, 겸손과 섬김으로 오신 분입니다. 성전을 깨끗이 하시며 예수님은 기도의 집이 상업의 장소로 변질된 현실을 고발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저주는 열매 없는 신앙과 위선을 책망하는 예표이며,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은 그들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이어지는 두 아들과 악한 농부의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서 옮겨져 열매 맺는 백성에게 주어진다는 심판 선포입니다. 이 장은 예수님의 권세를 거부하는 자들과 그 결과를 심각하게 보여주는 말씀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왕 되심 앞에 어떻게 응답할지를 묻게 합니다.
거절당한 왕,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사랑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그러나 이 환호는 며칠 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로 바뀌게 됩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예루살렘과 그 지도자들로부터 어떻게 거절당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그분의 권위는 도전받았고, 성전은 상업화되었으며, 무화과나무는 열매 없이 마르며, 비유를 통해 드러난 지도자들의 불순종은 결국 심판을 부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말씀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은 거절당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왕의 입성과 그 오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을로 가 나귀와 그 새끼를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이는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는 장면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메시아이시며 왕이신 예수님은 백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세상 권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칩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시아 나’에서 온 말로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기대하며, 로마의 억압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곧 오해로 바뀌고, 기대가 꺾이자 분노로 전환됩니다. 그분이 행하신 기적과 가르침은 백성에게 영적 해방을 말하지만, 그들은 물질적 해방만을 바랐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되, 나의 방식대로 구해줄 분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열매 없는 종교, 무너지는 성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마자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으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 장면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시는 예수님의 선포입니다.
‘기도하는 집’은 이사야 56장 7절에서 인용된 말씀으로,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열린 성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을 수단화하고, 자기 이익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이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더욱 굳히게 됩니다.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자, 그들은 오히려 분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입맞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을 온전하게 하셨다”는 시편 말씀으로 그들을 잠재우십니다.
다음 날, 예수님은 길에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에게서 열매를 찾으시나 없자 저주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이며,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모습은 형식만 있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영원토록 네게서 열매가 맺히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단지 나무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외식과 위선의 종교를 향한 심판 선언입니다. 신앙은 열매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잎사귀만 무성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예배하고 찬양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열매가 없는 그런 신앙 말입니다. 이것은, 글쎄요, 마치 말은 바른 듯하나 실제로는 무너진 지지대와 같은 상태입니다.
권위의 근원과 두 비유의 경고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온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묻습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그들의 질문은 단지 정보 요청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반문으로 응답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은 답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와 자기 이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아들은 “가기 싫다” 했지만 나중에 갔고,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순종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한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종들을 보내어 열매를 받으려 하나, 농부들은 종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보냈으나, 그 아들마저 죽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수차례 말씀하셨으나 듣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그 아들 예수까지 보내셨지만 거절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역사를 고발하는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경고는 단호합니다. 열매 없는 신앙, 거절하는 마음에는 심판이 따릅니다.
이 비유를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인 줄 알고 예수를 잡으려 하나, 무리를 두려워하여 하지 못합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얼마나 직접적이고 도전적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말씀을 회피하는 인간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계속 확장되어 갑니다.
결론
마태복음 21장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긴장감 있게 전개됩니다. 환호로 시작하지만, 충돌과 논쟁, 그리고 예언적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환영받지 못했고, 진리를 전하셨지만 듣지 않으려는 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멈추지 않으셨고,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무화과나무처럼 열매 없는 신앙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입으로만 순종하고, 실제로는 주의 뜻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영역처럼 붙잡고 거절하는 자리에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돌이켜 순종하라. 나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희는 그 아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 물음 앞에, 우리는 겸손히 무릎 꿇고 순종하는 자로 서야 합니다. 그것이 거절된 왕 앞에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진짜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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