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향한 결단의 삶
마태복음 19장은 예수님께서 유대를 향해 가시며 가르치신 중요한 말씀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장은 결혼과 이혼, 어린아이와의 관계, 부자 청년의 이야기, 제자도의 대가 등 다양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으나, 그 중심에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삶의 결단’이라는 굵직한 흐름이 놓여 있습니다. 인간관계, 재물, 자아, 공동체를 넘어 하나님을 따르는 삶의 태도를 깊이 성찰하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19장 구조
- 이혼에 대한 가르침(1-12절)
- 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13-15절)
- 부자 청년의 이야기(16-22절)
- 제자의 상과 하나님 나라의 보상(23-30절)
마태복음 19장 중요한 주제 해설
마태복음 19장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이혼 문제를 두고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며 창세기의 창조 질서를 다시 언급하십니다. 결혼은 사람이 나누지 못할 하나님의 언약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시며, 겸손하고 순전한 믿음 없이는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는 계명을 지켰다는 그 청년이 결국 재물을 버리지 못해 근심하며 떠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자아의 우상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자에게는 백배의 상과 영생이 있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인 기준과 계산을 뛰어넘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진심으로 따르려는 이에게는 전 존재의 결단을 요구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턱에서 멈춘 마음들
마태복음 19장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유대로 내려가시는 여정 속에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제 삶의 문제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혼이라는 현실적인 가정의 문제에서 시작해, 순전한 아이 같은 믿음, 그리고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제자들에게 주시는 약속까지. 이 장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며,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통스럽도록 직면하게 합니다.
이혼에 대한 가르침 – 창조 질서로의 회복(1-12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묻습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질문은 단순한 윤리적 고민이 아닌, 당대 유대 사회의 율법 해석의 충돌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하십니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는 창세기 2장을 인용한 말씀으로, 결혼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주어진 거룩한 언약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혼을 허락한 모세의 율법조차도,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임시로 허락된 것이라 밝히십니다. ‘완악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σκληροκαρδία sklērokardia’인데, 이는 단단한 심장, 즉 하나님의 뜻에 무감각하고 자기중심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관점을 법적인 논쟁에서 창조의 질서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더 나아가 “음행한 이유 외에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하심으로써, 결혼을 가볍게 여기는 문화를 정면으로 반박하십니다. 심지어 제자들이 “그렇다면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충격을 받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독신의 은사를 설명하시며, ‘오직 받은 자만이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결혼과 독신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삶이어야 함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결혼은 여전히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의 틀입니다. 이 틀을 회복하는 것은 법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완악함을 돌이키는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그 중심을 찌르고 계십니다.
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 – 작지만 큰 믿음(13-15절)
그 다음 장면은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오는 부모들과 그들을 막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아이들의 접근을 방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다시 천국의 질서를 뒤집으십니다. 당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별로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작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천국의 모델로 삼으십니다. 이는 단지 어린이를 사랑하라는 정도의 메시지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의존적이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순전한 태도가 천국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에게 안수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안수하다’는 헬라어 ‘ἐπιτίθημι epitithēmi’는 손을 얹어 권위를 부여하거나 복을 선포할 때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이 작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문턱을 다시 세우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종종 ‘작은 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영향력, 재능, 헌신도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고 판단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를 보십니다. 천국은 자기 자신을 작게 여기는 자의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자 청년과 제자의 상 – 진심과 소유 사이(16-30절)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여전히 불안했고 갈급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계명을 지키라 하시고, 그가 대답하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헬라어 ‘τέλειος teleios’로, 완전함,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단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전 존재로 하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 나라’ 앞에서 무엇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돈은 중립적인 수단일 수 있지만, 우리 마음의 보물이 되는 순간 하나님보다 더 큰 주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며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은 당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부는 하나님의 복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놀라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그리고 베드로가 묻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무엇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장차 임할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씀은 세상의 보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관계와 정체성,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덧붙이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결코 평가할 수 없는 역설의 나라입니다. 이 말을 누가들으면 좀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깊은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결론
마태복음 19장은 천국 백성이 이 땅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부부 관계, 자녀 양육, 소유에 대한 태도, 공동체 안에서의 겸손과 믿음—all of these are deeply spiritual matters. 하나님 나라는 단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그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장 앞에서 결혼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믿음이 어린아이 같은지, 혹은 청년처럼 무엇인가를 붙잡고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포기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백배로 채워주신다는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좁은 문이지만, 그 길 끝에는 참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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