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 묵상

마태복음 18장, 천국 백성의 길, 낮아짐과 용서

마태복음 18장은 예수님께서 공동체 안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질문,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로 시작하여,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예로 들어 천국의 기준은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임을 선포하십니다. 이어지는 비유와 권면들은 공동체 안에서의 겸손, 돌봄, 회복, 용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장은 교회와 성도의 삶이 개인의 영광이 아닌, 주님의 마음을 따르는 삶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게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구조

  1.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교훈(1-5절)
  2.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6-9절)
  3. 잃은 양의 비유(10-14절)
  4. 죄 지은 형제를 대하는 법(15-20절)
  5.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과 일만 달란트 비유(21-35절)

마태복음 18장 중요한 주제 해설

마태복음 18장의 핵심 주제는 공동체 안에서의 ‘낮아짐’과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라고 하십니다. 이는 겸손과 의존, 순전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는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보호하는 책임의 무게를 강조합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이라도 잃지 않으시려는 목자의 심정을 보여주며, 공동체는 이와 같은 돌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말합니다. 죄 지은 형제를 대하는 부분에서는 회복을 위한 절차와 그 중심에 있는 사랑의 자세를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질문을 통해 예수님은 용서의 제한이 없음을 선언하시며, 일만 달란트 비유로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와 그에 응답하는 성도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이 장은 교회의 윤리를 넘어, 천국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영적 태도를 묵직하게 가르쳐줍니다.

천국 백성의 길, 낮아짐과 용서의 영성

예수님께서 고난을 향해 나아가시던 그 마지막 여정 속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놀랍게도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이 질문으로 시작하여, 하늘나라의 질서와 공동체의 삶이 무엇에 기초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겸손, 돌봄, 용서, 회복,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한 마음. 고난주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장은 다시금 ‘하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교훈(1-5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믿었고, 그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여전히 세속적 크기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 앞에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서 ‘돌이켜’라는 단어는 헬라어 ‘στρέφω strephō’로, 방향 전환, 삶의 회심을 의미합니다. 단지 생각의 변화가 아닌 존재의 전환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은 단순한 순진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의존하고, 자신을 비울 줄 아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권리가 없는 자, 가장 낮은 자를 상징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하십니다. ‘자기를 낮춘다’는 헬라어 ‘ταπεινόω tapeinoō’는 스스로를 낮추고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본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겸손을 따르는 삶. 그것이 천국의 위계질서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덧붙이십니다. 이는 단순히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뿐 아니라, 약하고 연약한 자를 대하는 성도의 태도 전체를 포함합니다. 낮은 자를 향한 태도가 곧 하나님을 향한 태도임을 주님은 명확히 하십니다. 세상은 힘을 섬기지만, 천국은 겸손을 섬기라 하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6-9절) & 잃은 양의 비유(10-14절)

예수님은 곧바로 실족하게 하는 자들에 대한 무서운 경고를 던지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헬라어 ‘σκανδαλίζω skandalizō’, 곧 함정에 빠뜨리다, 죄의 길로 미혹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작은 자’는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모든 이들을 포함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이들의 믿음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죄에 이르게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호하시고자 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세상은 실족하게 하는 일로 말미암아 화가 있도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양 백 마리 중 하나가 길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목자는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러 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다수를 만족시키는 데서 기쁨을 얻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잃은 하나를 찾는 데서 진정한 기쁨을 느끼십니다. 이 사랑은 개인적이며,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단 하나의 영혼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공동체, 그것이 천국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너무 자주 아흔아홉에 만족하고, 잃은 하나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그 무관심이 때로는 죄가 되고 맙니다.

죄 지은 형제를 대하는 법(15-20절) &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과 일만 달란트 비유(21-35절)

예수님은 공동체 안에서 죄를 범한 형제를 대하는 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십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인을 데려가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단죄가 목적이 아니라 회복이 목적입니다. ‘얻는다’는 단어가 헬라어 ‘κερδαίνω kerdainō’인데, 이는 경제적 이득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 영혼의 구원을 뜻합니다.

이 권면의 끝은 단절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하며, 기도와 동행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공동체의 기도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공동체의 결정은 천국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질문은 실로 현실적입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관대한 듯 말했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곧 무한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일만 달란트 비유를 통해 그 말씀을 구체화하십니다. 어떤 임금에게 큰 빚을 진 종이 있었습니다. 그 빚은 일만 달란트. 1달란트가 약 6천 데나리온, 곧 1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라 하면 거의 16만 년치 임금입니다. 사실상 갚을 수 없는 빚이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겨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100일치 임금)을 빚진 동료를 만나 목을 잡고 감옥에 가둡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임금은 진노하며 말합니다.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거늘,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무한한 용서를 기억하게 합니다.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복음의 반응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에서 용서받았는지를 아는 자는, 타인의 죄를 쉽게 정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종종 우리는 백 데나리온을 문제 삼고, 일만 달란트를 잊어버립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위선이 되고, 복음은 구호로 전락합니다.

결론

마태복음 18장은 천국 공동체의 윤리를 말합니다. 겸손한 자가 크고, 잃은 자를 찾는 자가 하나님의 기쁨이며, 용서하는 자가 하나님을 닮은 자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구조를 설계하는 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 앞에 선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자신을 낮추셨는지를 기억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신 주님, 잃은 우리를 찾아 오신 주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 그 주님의 삶이 바로 마태복음 18장의 삶이었습니다. 이제 그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낮아지고, 안아주고, 용서하며. 그럴 때 우리도 천국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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