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 개요
세례 요한이 헤롯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게 됩니다. 헤롯의 생일,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하고, 헤롯이 무엇을 줄까 물으니 엄마인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고 세례 요한을 복을 요구합니다. 결국 세례요한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빈들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밤 사경에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지만 베드로가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말하지만 물에 빠지고 맙니다. 게네사렛 땅에서 병든 자들을 고칩니다.
마태복음 14장 구조
- 1-12절 세례요한의 죽음
- 13-21절 오병이어의 기적
- 22-33절 물 위를 걷다.
- 34-36절 게네사렛에서 병자를 고치시다.
마태복음 14장 묵상
1-12절 세례요한의 죽음
예수의 소문을 듣고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된 과거의 회상입니다. 즉 세례 요한은 이리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활동하면서 엄청난 소문이 휘몰아 치자 전에 자신이 죽였던 세례요한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죽었던 세례요한의 능력이 예수 안에서 ‘역사하는도다'(2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왕이 근심하나
이 단락의 핵심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아니라 헤롯이 갈등에 있습니다. 헤롯은 이두매인으로 에돔족속과 유대인이 반반씩 섞인 사람들입니다. 하스몬왕가의 요한 히르카누스가 통치할 때(B.C. 134~104) 시절에 유대인들이 강제적으로 에돔족속들에게 할례를 시키고 유대안으로 편입시켰습니다. 그후로 그들은 유대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에돔족속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살아갔습니다.
헤롯대제가 로마에 엄청난 돈을 쓰고 정치력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면서 헤롯가문이 대대로 이곳이 왕 또는 분봉왕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교활하고 포악했지만 세례요한을 존중했던 헤롯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활한 헤로디아가 자신을 모욕한 세례요한을 비판하자 헤롯을 시켜 그를 감옥에 가둔 것이다. 하지만 죽이기에는 여론이 너무 좋지 않아 그대로 있다 갑자기 기회를 잡은 것이죠. 결국 헤롯은 세례요한을 어떻게 할 것인지 갈등하지만 자신이 밖으로 내 뱉은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세례요한을 죽이게 합니다.
헤롯은 전형적인 세속과 하나님의 나라의 중간 지점에서 갈등하는 존재입니다. 결국 세상을 택하는 존재입니다. 그의 육신적 정체성은 결국 영적 정체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택했다는 말은 자신을 택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자신을 택하는 자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버릴 것입니다.
13-21절 오병이어의 기적
오병이어나 칠병이어 사건은 항상 출애굽 사건을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광야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 채우시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에서는 예수님을 직접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요 6:511)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무리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따라옵니다. ‘무리가 듣고'(13) 따라온 것을 것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든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병도 낫고, 먹을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어디서도 보호 받지 못하고 늘 버려진 존재와 같았습니다.
불쌍히 여기사의 헬라어 스크랄크조마이(σπλαγχνιζομαι)는 스프랄크나(σπλάγχνα)2에서 왔는데 ‘창자’ 또는 ‘내장’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무리를 보시면서 창차가 뒤틀리는 고통을 느낀 것입니다. 창자는 종종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내가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상대의 아픔과 고통을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기적의 이유는 바로 ‘긍휼’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욕망과 자랑을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자신을 모욕하는 대제사장이나, 빌라도, 헤롯을 그냥 두었을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식을 마치시고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죠. 기적은 아무곳에서나, 아무렇게 행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놀라운 계획 속에서 의도된 결과입니다.
열두 바구니
여기서 주의해 볼 것은 바구니와 광주리의 차이입니다. 바구니는 작은 소풍용 도시락입니다. 하지만 칠병이어 때는 일곱 광주리가 남습니다. 광주리는 사람이 들어갈 만큼 큰 용량입니다.(참조 마 15:37, 마 8:8; 행 9:25)3
열둘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의미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이들이 하나님께 만나를 먹고 광야에서 살아갔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병이어는 이스라엘의 영적 공동체를 강조하며, 칠병이어는 모든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비전을 말합니다.
22-33절 물 위를 걷다.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
오병이어는 엄청난 기적이었습니다. 기적을 행할 때 예수님의 엄청 힘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인기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공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요 6:154)
이러한 유혹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무조건 도망쳐야 합니다. 그 현장을 벗어나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나는 유혹을 이길 수 있어, 성령님이 도와 주실거야! 하는 순간 멸망의 길로 미끄러집니다. 그러한 생각 자체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요셉이 왜 애굽에서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까? 유혹을 이긴 것이 아니라 도망쳤기 때문입니다.(창 39:135)
예수님은 군중들로부터 벗어나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합니다. 22절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마 14:22)하여 배를 타고 그곳을 빠져 나가도록 하십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주목하면 빨리 벗어나십시오. 사람들이 당신들을 칭찬하면 빨리 골방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래야 타락하지 않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
‘밤 사경’은 유대 시간으로 이른 새벽입니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면 그 때부터 하루가 시작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시간을 사용하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시고 어둠이 내릴 때를 ‘제 육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마 27:45) 밤 사경은 밤이 시작된 지 네 번째 경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 경은 3시간 정도이니, 사경은 오후 6시경부터 4경째가 되었으니 새벽 3시부터 6시 정도를 뜻합니다. 해가 뜨기 직전 가장 어두울 때를 말합니다. 이 부분은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오후 해가 지기 전 기도하러 가셨다가 새벽에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걸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물 위를 걷는 사건은 모든 혼돈과 무질서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뜻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태초의 지구는 혼돈의 상태였지만 창조 6일째가 되면 완전한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자연의 법칙을 만드신 이는 자연의 법칙을 초월해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각주]
- 요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요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 6: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 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 - 행 1:18에서 가룟의 유다의 창자가 흘러 나왔다에 사용되며, 빌립보서 2:1에서는 ‘긍휼’로 해석합니다. 현대인들은 마음은 심장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대사람들은 창자라고 생각합니다. 분노와 사랑, 기쁨과 즐거움이 창자에서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실제로 의학적으로 창자는 사람들의 감정에 따라 극심한 변화를 나타냅니다. 특히 여성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장에서 받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
- 마 15: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막 8: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행 9: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 -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 창 39: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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