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장 개요
예수님은 계속하여 기적을 베풀고 사람들을 치유하십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사람들은 계속하여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고 비방합니다. 12장에는 손마른 사람의 치유와 바알세불 논쟁, 악한 세대의 표적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12장 구조
- 1-8절 안식일에 이삭을 자른 제자들
- 9-21절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
- 22-37절 바알세불 논쟁
- 38-45절 표적을 구하는 세대
- 46-50절 새로운 가족
마태복음 12장 묵상
1-8절 안식일에 이삭을 자른 제자들
이삭을 잘라 먹으니
수많은 안식일 논쟁 중의 하나입니다.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가다 배고 고파 밀 이삭을 잘라 먹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보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며 비방한다. 여기서 우리는 남의 것을 훔친다는 개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는 전통적으로 허용되는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는 것’을 노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쟁점은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과 허기진 것 사이의 갈등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의 한결같은 안식일 관련 주장은 어떤 이유든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생명의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한 엄격한 기준으로 성경에도 없는 근거로 자신과 타인들을 옭아 매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시장할 때 한 일
예수님은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소개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갈 때 제사장만 먹을 수 있었던 진설병을 먹은 일입니다. 다윗과 일행이 사울을 피해 놉에 가서 제자장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달라할 때 제사장은 성결한지를 묻고 성막에서 꺼내온 진설병을 내어 줍니다. 율법에서 금하고 있지만 다윗은 먹었고,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죄를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 부분은 7절에서 밝힌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삼상 21:1-6
21: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21: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21: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21: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21: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21: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안식일과 제사장
주님은 다윗의 예를 드시고, 또 한 가지를 더 언급합니다. 그것은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일을 함으로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엄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사를 드릴 수 없고, 안식일의 의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장들이 안식들이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에 대해 율법을 ‘죄’라고 금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사장들의 안식일 범하는 것을 ‘죄가 없음’으로 해석한 성경의 원리를 가져옵니다.
- 민 28:9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
주님은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로 소개하십니다. 성전 안에 있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일해도 율법을 범한 것이 아니듯,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과 평안이 주님 안에 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주님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호세아 6:6을 인용하여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과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소개하고 있다.
-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인애는 헤세드이며, ‘긍휼’ ‘자비’ ‘사랑’ 등으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관계 안에서 사랑합니다. 율법은 언약 아래 있으며, 후에 생긴 것입니다. 율법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깊은 저의를 알지 못하고 잘못된 문자적 해석에 빠져 하나님을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는 안식의 주인’이란 표현은 참된 안식은 주님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고, 성전보다 큰 이가 주님이란 것과 맥적으로 동일한 의미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지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어기나 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9-21절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
회당에 들어가시니
주님은 논쟁을 마치고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이 날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여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날입니다. 현재의 교회 시스템과 회당은 매우 비슷합니다. 말씀 낭독자가 있고, 랍비나 율법에 능한 자가 와서 율법을 해석해 줍니다. 교제하고 식사합니다.
주님은 자신이 유대인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관습을 파괴하고 무너뜨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어진 환경과 관습 안에서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율법의 본질에 반하고 잘못되었다면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마르다’는 표현은 장애를 뜻합니다. ‘마른’으로 번역된 헬라어 ‘ξηρός’는 문자적으로 말랐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3:15에서 ‘(마른) 육지’를 뜻하고, 누가복음 23:31에서는 ‘마른 나무’로 번역했습니다. 많은 곳에도 ‘손 마른’ 사람으로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막 3:3, 눅 6:6 등) 손이 말랐다는 표현은 마비 되었다는 뜻이며,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지만 주님은 당연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10절을 유심히 읽으면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발한 것입니다. 참으로 교활하고 악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의 악이, 그들의 질문으로 인해 폭로됩니다. 그들은 손 마른 사람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병’으로 해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은 해결할 마음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유일한 능력은 예수님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들의 도발적인 질문에 주님은 그들의 양아치 같은 위선을 고발합니다. 11절을 보면, 그들은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뻐져 죽어갈 때 그것은 두지 않고 건진다고 말합니다. 당시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율법과 상관 없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병든 사람이 있다면 율법에 어긋난다하여 그대로 두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죠. 사람은 양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설명하시고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절)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고쳐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었습니다. 회복은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의도하신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퇴보하고 타락한 세상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바른 말씀 선포과 선을 위한 기적을 보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합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 자신들이 정한 룰에 예수님이 따르지 않는 것을 괴씸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이 어떻든, 율법이 무엇이든 상관 없이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능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 했던 개혁주의자들이자 실천주의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죄인이었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정한 법칙을 함몰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보다 자신들의 법칙을 더 우위에 두는 악한 자들입니다.
22-37절 바알세불 논쟁
38-45절 표적을 구하는 세대
46-50절 새로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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