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 강해

누가복음 10장 강해|가까이 오신 하나님 나라와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랑

들어가는 말|누가복음 10장이 던지는 중심 질문

누가복음 10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시는 여정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9장 51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얼굴을 굳게 하셨습니다. 그 길은 고난과 십자가,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홀로 그 길을 가시지 않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앞서 보내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게 하시고, 한 율법교사의 질문을 통해 참된 이웃 사랑을 가르치시며,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말씀을 듣는 제자의 자리를 보여 주십니다.

이 장은 세 가지 질문을 함께 던집니다. 복음은 어떻게 전해져야 하는가,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가, 그리고 제자는 무엇을 가장 먼저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중심 명제는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까이 임한 하나님 나라를 전하게 하시며, 자기 백성을 낯선 이의 고통에 가까이 가는 사랑과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 믿음으로 부르십니다.

칠십 인을 보내시는 예수님|1-16절

예수님은 따로 칠십 인을 세우셔서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십니다. 일부 사본에는 칠십이 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숫자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본문의 핵심은 특정 숫자의 상징을 계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보내신 데 이어, 더 넓은 범위의 제자들을 복음 전도의 일꾼으로 파송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연상시키며 새 언약 공동체의 기초를 보여 주었습니다. 칠십 또는 칠십이는 창세기 10장에 열거된 열방의 수나, 모세가 세운 칠십 장로를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를 지나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누가복음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이 파송은 하나님 나라 복음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할 것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10:2). 추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함께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막연히 군중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 즉 주인의 밭에 있는 추수할 곡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첫 명령은 “가라” 이전에 “청하라”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인간의 열정이나 전략에서 시작되기보다, 추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일꾼을 보내 달라고 구하는 기도에서 시작합니다. 교회는 전도를 중요하게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의 열매는 기술이나 숫자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10:3). 제자의 파송은 안전과 성공이 보장된 길이 아닙니다. 세상은 복음을 환영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거절하고 조롱하며 대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리로 바꾸어 이리를 이기게 하지 않으십니다. 어린 양처럼 보냄받는 제자들은 폭력과 지배의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유와 진리, 인내와 희생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합니다.

지갑과 배낭과 신발을 가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는 말씀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여행 준비를 금하라는 규칙이 아닙니다. 이는 긴급한 파송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자신들의 재정과 안전, 인간관계의 관습에 매이지 않고 사명에 집중하도록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그들은 복음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신뢰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평안(εἰρήνη, 에이레네, eirēnē)은 단지 인사말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의 배경을 지닌 이 평안은 하나님과의 화목, 관계의 회복, 삶의 온전함을 뜻합니다. 평안의 아들이 거기에 있으면 그 평안이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에게 돌아옵니다. 복음은 억지로 사람에게 주입되는 강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를 받아들이도록 초대하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한 집에 머물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사역자는 물질을 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교회는 말씀과 복음 사역을 위해 수고하는 이들의 필요를 책임 있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역자의 청빈을 요구하며 정당한 돌봄을 외면하는 것도, 사역을 부와 특권을 얻는 수단으로 만드는 것도 모두 복음의 길과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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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영접받는 성이나 마을에서는 병든 사람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고 말해야 합니다(10:9).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치유는 함께 나아갑니다. 그러나 치유가 하나님 나라의 전부는 아닙니다. 병 고침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지이며, 그 표지가 가리키는 중심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반대로 복음을 거절하는 성에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환영하는 사람에게만 임하는 선택적 현실이 아닙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은혜의 초청과 함께 책임도 따릅니다.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을 책망하시며, 그곳에서 행한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이 회개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많은 빛을 받은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10:16). 이 말씀은 복음 전도자 개인의 모든 말과 행동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는 선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실히 전할 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이 권위를 자기 권력으로 사용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사탄의 권세가 무너지고 하늘에 기록된 이름|17-24절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단순한 주문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분의 인격과 권세를 뜻합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제어한 것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10:18). 이 말씀을 사탄의 최초 타락에 대한 상세한 역사적 설명으로만 읽기보다, 예수님의 사역과 제자들의 파송을 통해 사탄의 지배가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선언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적절합니다. 사탄은 여전히 활동하고 대적하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 앞에서 그의 권세는 이미 치명적인 패배를 맞았습니다.

예수님은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뱀과 전갈은 실제 위험을 가리킬 수 있으나, 문맥상 악한 영의 권세와 해로운 힘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모든 성도가 아무 위험이나 감수해도 된다는 약속으로 오용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사탄의 궁극적 권세가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백성을 파괴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 큰 기쁨의 근거를 가르치십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0:20). 사역의 능력과 눈에 보이는 성공은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신자의 가장 깊은 기쁨은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 앞에 기억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은사와 열매는 다양하고 변할 수 있으나, 은혜로 주어진 구원은 성도의 참된 정체성과 기쁨의 근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감사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10:2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지적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로 획득하는 보상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와 자격을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성부와 성자의 독특하고 완전한 관계를 밝히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10:22). 하나님은 인간의 추론만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시는 만큼 참되게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많은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유일한 계시자이시며 구원의 중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한 것을 제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더 훌륭해서가 아니라, 구약의 약속이 성취되는 결정적 때에 예수님과 함께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25-37절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일어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율법교사는 구약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그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합니다(10:27). 이는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결합한, 율법의 핵심을 잘 요약한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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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완전한 사랑의 행위로 구원을 벌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완전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이 요구의 깊이를 축소하려 합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그의 질문은 “내가 사랑해야 할 최소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대답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매를 맞아 거의 죽은 채 버려집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급격히 내려가며 위험한 구간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인지 명시되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청중이 유대인 여행자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사장이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지나갑니다. 이들을 단순히 잔인하고 위선적인 사람으로만 묘사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시체에 접촉하여 부정해질까 염려했을 수도 있고, 강도가 남아 있을 위험을 우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그럴 법한 이유를 인정하면서도,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외면하게 만드는 종교적·사회적 계산이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음을 폭로합니다.

그 뒤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랜 종교적·민족적 적대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 청중에게 가장 예상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그는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며,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돌봅니다. 다음 날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추가 비용도 돌아올 때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단지 불쌍히 여기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시간과 위험, 물질과 수고를 지불하여 고통받는 사람의 이웃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질문의 방향이 바뀝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가 됩니다.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직접 꺼내지 못할 만큼 그 경계가 강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막연히 착한 사람이 되라는 도덕 교훈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이 불편해하고 경계 밖에 두었던 사람의 고통에도 가까이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비유를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이고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이라는 알레고리로 모든 세부까지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비유의 일차적 초점은 이웃 사랑의 경계를 깨는 데 있습니다. 다만 죄와 상처로 쓰러진 사람에게 가까이 오셔서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긍휼이 이 비유의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 토대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자비를 입은 사람들이기에 이웃의 고통 곁으로 갈 수 있습니다.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38-42절

예수님은 한 마을에 들어가시고, 마르다라는 여인이 자기 집으로 영접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실제로 맞아들여 섬긴 사람입니다. 그의 섬김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상태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분주하다(περισπάω, 페리스파오, perispaō)는 사방으로 끌려가 산만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발치”는 제자가 스승에게 배우는 자리입니다. 당시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넓게 허용되지 않았던 제자도의 자리에 마리아가 앉아 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단순한 가사 노동의 보조자로 제한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듣는 제자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10:41-42). 예수님은 섬김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시며 사랑으로 그의 분주함을 드러내십니다. 문제는 섬김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보다 앞서고, 그 섬김이 비교와 원망, 자기 의로 바뀐 데 있습니다.

“좋은 편”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그분 자신을 우선으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봉사와 헌신은 소중하지만,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흘러나오지 않을 때 쉽게 불안과 경쟁, 탈진의 근원이 됩니다. 마리아의 선택은 현실 책임을 회피하는 영적 도피가 아니라, 모든 섬김과 사역의 근원이 되어야 할 말씀의 자리를 지키는 믿음입니다.

핵심 구절과 원어 해설

가까이 왔다(ἐγγίζω, 엥기조, engizō)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이는 단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로 임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으로 건설할 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어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은혜로운 다스리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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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πλησίον, 플레시온, plēsion)

이웃은 원래 가까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웃의 경계를 뒤집으십니다. 이웃은 내가 편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 앞에 고통받는 사람으로 나타난 이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십니다.

자비(ἔλεος, 엘레오스, eleos)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을 “자비를 베푼 자”라고 부릅니다. 자비는 감상적 연민이 아니라, 고통을 본 사람이 실제로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성경의 자비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가까이 오셨기에, 성도는 타인의 상처와 필요를 외면하지 않도록 부름받습니다.

구약의 약속과 그리스도 안의 성취

칠십 인의 파송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방을 향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창 12:3).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지만, 그의 복음은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을 향합니다.

“평안”의 선포는 선지자들이 약속한 샬롬의 회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통치 아래 평화와 의가 회복될 것을 예언했습니다(사 9:6-7). 예수님은 그 평화를 가져오시는 왕이시며, 십자가를 통해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참된 화목을 이루실 분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비는 레위기 19장의 이웃 사랑 계명과, 과부·고아·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신 율법의 정신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중심을 삶의 현장으로 가져오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교리와 성경 상징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선교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자신에게서 시작되며, 교회는 그 나라를 대신하여 세우는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종입니다. 따라서 선교와 전도는 교회의 성장 전략이 아니라, 가까이 임한 하나님 나라를 겸손히 알리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으나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은사보다 앞서는 구원의 기쁨

칠십 인은 귀신들이 항복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 기록된 이름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은사, 능력, 숫자, 영향력을 기뻐할 수 있으나, 그것이 복음의 중심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큰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길과 집의 상징

누가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은 길 위에서 복음을 전하고, 집에서 평안을 선포하며, 주막에서 상처 입은 자가 돌봄을 받고, 마르다의 집에서 말씀을 듣습니다. 복음은 성전이나 회당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길과 가정, 낯선 이의 상처, 일상의 식탁과 섬김의 자리까지 들어가 인간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의 교회와 성도에게 주는 교훈

첫째, 교회는 추수의 주인께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방법을 바꾸는 일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지혜로운 준비와 소통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 없는 열심은 쉽게 자기 성과를 추구하게 되고, 복음 전도는 부담스러운 활동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사역의 성공보다 구원의 은혜를 더 기뻐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열매가 있을 때 교만해지기 쉽고,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성과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이 사역보다 먼저입니다.

셋째, 이웃 사랑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구체적 행동이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위험한 길에서 멈추었고, 상처를 돌보았으며,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사용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이웃은 가까운 가족과 교우일 수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병든 사람, 이주민, 관계에서 밀려난 사람,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한다는 뜻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을 실제로 지는 일입니다.

넷째, 섬김은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마르다의 수고는 귀했지만, 말씀을 놓친 분주함은 원망으로 변했습니다. 교회 봉사와 목회, 가정의 돌봄, 직장의 책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예수님의 발치에 머무는 시간을 사치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서 멀어진 섬김은 결국 자신과 타인을 지치게 합니다. 마리아의 좋은 편은 활동을 포기하는 길이 아니라, 모든 활동의 중심을 그리스도께 두는 길입니다.

맺음말|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누가복음 10장은 칠십 인의 파송, 사탄의 권세가 무너지는 기쁨,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비, 마리아의 말씀 경청을 한 장에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장면은 제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줍니다. 제자는 가까이 임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능력보다 하늘에 기록된 이름을 기뻐하는 사람이고, 상처 입은 이의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람이며,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사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먼저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죄와 죽음의 길가에 쓰러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구주이십니다.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제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아, 말씀을 듣고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전하게 됩니다. 다음 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본을 가르치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삶과 위선적인 종교를 경계하는 삶을 더욱 깊이 가르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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